들깨 타작

2019.03.30 17:17

신효선 조회 수:36

들깨 타작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신 효 선

 

 

 

 

 

  6월쯤 텃밭에 들깨를 10평 남짓 심었다. 그동안 깻잎 따먹는 재미로 몇 포기 심어보았지만, 아예 들깨를 수확하려고 심은 것은 처음이다. 너무 일찍 모종을 구해 작은 모종을 간격 없이 뵈게 심은 것 같다. 그래도 텃밭에 들깨 향이 가득했다. 어린 들깨가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솎아내고 자리 잡아 자라기 시작할 때쯤 아들이 사는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한 달쯤 여행을 마치고 7월 초 돌아와서 가장 먼저 텃밭으로 달려갔다. 어린 아이는 아니지만, 채 땅 맛을 들이지 못한 어린 작물들을 놓아두고 집을 오래 비운 게 마음에 걸려서다. 더구나 우리가 없는 사이 더위가 심하고 가뭄이 시작되었기에 더욱 조마조마했다.

  평상시 같으면 당연히 남편이 승용차에 실어 날라서라도 작물이 마르지 않게 물을 주었을 텐데, 갑자기 그이 손에 탈이 나서 운전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라 물을 나를 수도 없었다. 운전을 배워두지 못한 게 퍽 후회가 되었다.

  올해는 유례없는 폭염과 가뭄이 심했다. 밭작물을 쳐다보면 내 마음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텃밭에는 토마토, 오이, 가지, 상추, 아욱, 치커리, 들깨, 고구마, 고추, 울금 등이 가득했다. 밭에 들어서면 ‘제발 물 좀 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주인 잘못 만나 작물들이 이런 시련을 겪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해 발만 구르고 있었다.

  생각다 못해 페트병에 물을 담아 배낭에 몇 병 넣고 몇 개는 손에 들고 가서 급한 농작물부터 주었다. 나름대로 가뭄을 잘 견디는 들깨는 물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 폭염을 잘 이겨냈다. 사상 초유라고 매스컴에서 걱정하던 더위도 세월을 이길 수 없었던지 가을이 성큼 찾아왔다.

  이전에 들깨를 심어 깻잎을 따 쌈을 싸먹기도 하고, 깻잎 김치를 담가 먹기도 했으며. 깻잎을 따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곰삭은 깻잎장아찌는 한겨울 밑반찬으로 좋은 먹거리가 되었다. 올해는 아예 들깨를 수확할 작정으로 밭의 1/3에 들깨를 심었는데, 극심한 가뭄에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더위와 가뭄을 이겨내고 가을과 함께 들깨가 결실을 보았다. 아무래도 수확은 부실할 것 같다. 그래도 끝까지 잘 견디어 준 들깨가 고마웠다. 들깨 꼬투리가 거뭇거뭇 익어가고, 잎이 노릇노릇 단풍이 들었다. 들깨를 수확할 때가 된 것이다.

 

  파란 하늘이 더없이 높고 바람이 살랑거리는 멋진 가을날 밭으로 갔다. 옛날 친정에서 일꾼들이 들깨 타작할 때면 네 발 달린 도리깨가 하늘을 돌아 땅으로 힘껏 내려치면 우두둑우두둑 들깨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도리깨가 한 번 돌아 휘리릭, 두 번 돌아 후루룩 떨어지면 고소함이 마당에 은은히 퍼졌다. 그 고소한 향기는 가을걷이의 고단함도 잊게 해주었다.

  하지만, 들깨 수확 경험이 없는 내가 준비한 것은 커다란 플라스틱 통과 시원하게 등을 긁는 튼실한 대나무 효자손이 전부였다.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남편이 며칠 전 들깨를 베어 밭에 널어놓고 갑자기 병원에 입원해서 내가 타작을 해야 했다. 들깨는 지금 수확하지 않으면 깨가 다 쏟아져 못쓰게 된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햇볕에 잘 마른 들깨를 타작하겠다고 한 줌 들고 커다란 통에 넣고 효자손으로 두들겼다. 투두둑 투두둑 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작은 씨앗 하나가 수백 배로 늘려 나오는 자연의 이치가 경이로웠다. 등을 긁어야 할 효자손이 들깨 수확하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몰랐다.

   나처럼 큰 통에다 깻대를 넣고 두들겨 터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효자손을 가지고 들깨 타작을 하다니, 그렇게 한창 깨를 털고 있는데, 텃밭을 같이 하는 아줌마가 와서 보더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효자손으로 들깨를 터는 건 처음 본다며 한참 웃더니, ‘어레미와 키를 가져왔냐?’고 물었다. 나는 큰 통과 대나무 효자손, 그리고 비닐봉지 몇 개만 들고 왔다고 했다.

  내가 하는 말과 일하는 모습에 어이없어하던 그 아줌마는 나를 만나면 언제나 살갑고 정이 많은 젊은 새댁으로서 웃으며 막대기를 가져다가 깨를 털고 키질을 하여 얌전하게 들깨 알맹이만 모아주었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지만, 키질이나 어레미로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을 했는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들깨는 2kg 정도 수확했지만, 이웃과 나눈 정은 어디에 비교할 수 없었고, 나에게는 더없이 흐뭇한 하루였다.

  나는 그 아줌마를 ‘이쁜 아줌마’라 부른다. 이쁜 아줌마는 텃밭 사람 모두와 언니 아니면 동생으로 지낸다. 이곳 텃밭은 여럿이 분양을 받아 서로가 도와가며 재미있게 경작하는데, 밭 가장자리에 이쁜 아줌마가 만든 텃밭 아줌마들의 사랑방 같은 찻집이 있다. 차 외에도 가끔 칼국수와 고구마, 떡 등 푸짐한 간식거리를 가져와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더러는 닭죽도 푸짐하게 쑤어서 나누어 먹는다. 의자 몇 개에 가까스로 햇볕 가리는 옹색한 공간이지만, 텃밭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각별하게 정이 깃든, 요즘 도심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공간이다.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들깨를 타작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 세상사 흘러가는 바람이듯 구름이듯 살아가는 맛을 체험했다. 들깨를 수확하느라 먼지를 뒤집어쓰고 끙끙대며 일을 마쳤지만, 어찌 힘든다고 하겠는가? 남편이 나에게 원예치료가 된다고 권해서 시작한 텃밭이지만 치료를 넘어 즐거운 행복까지도 가져다준 텃밭이었다.

 

(2018.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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