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5 08:18
20170419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인생
“야, 나 항암 안 하겠다고 병원에 통보 했어. 결정하고 나니 마음 편하다 야, 흐흐”
오빠 특유의 화통한 대화법이 짠하다. 끄트머리에 이어지는 허한 웃음도 뭔가 확신 없이 내 의견에 동의할 때 듣던 작은 오빠의 웃음소리다.
지난 해 1월에 오빠는 췌장과 대장을 각 십 센티씩 잘라냈다. 수술도 할 것 없고 항암 치료도 하지 말고 면역력 강하게 하는 생활로 바꾸라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내 뜻과는 상관없이 오빠 맘대로 했다. 내 목숨 아니라서 쉽게 말했나? 오빠가 병원비 감당 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도 안 되고 딱히 병 수발 들어 줄 사람도 없는 환경이라서 그리 말 했던 걸까, 내가?
미국과 한국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온 우리 남매는 모든 것이 다르다. 생활습관, 신앙생활, 건강관리 및 인생관까지 같은 구석이 없다. 그럼에도 난 오빠 삶에 잔소리를 한다. 이러면 안 돼, 저러면 안 돼. 돈은 내가 보내 줄 테니 자연치유 하도록 이래라 저래라.
돈 유세를 떠는 건 아닐까 가끔 반성도 해 봤지만, 틀린 소리가 아니지 않는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오빠 역시 만만한 사람 아니다. 내가 돈 안 보태도, 없으면 없는 대로 한국 정부에서 다 도와주니까 걱정 말라 고 큰소리다.
수술은 깔끔하게 잘 됐고, 항암 치료를 강요하는 의사의 처방에 잠시 망설이더니 극구 말리던 내게는 말도 없이 두 번이나 항암을 했다는 전갈이다. 중간에서 전하는 사람이 곤란해 한다. 재발 하면 죽는단다. 항암 치료해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의사 말에 겁먹은 우리 오빠. 난 그만, 보내 주려던 병원비, 치료비를 끊고 돌아섰다. 돈 없으면 항암치료 중단 하겠지.
소식까지 끊고 두어 달 지났다. 생각 해 보니 내가 이럴 것이 아니다. 내 목숨도 아닌데 내가 왜 내 생각대로 장이야 멍이야 판을 주도하려 안간힘인가. 내 틀에 오빠의 인생을 꾸겨 넣지 말자. 세상에 남은 단 둘. 우리 남매가 아닌가.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나이 삽 십전에 떠난 큰 오빠 생각에 가슴 저린 우리 둘. 서로 아프게 말자. 타고난 명대로 살다 갈 것이니, 이렇게 토라져서 안 보고 살 이유가 없다. 시간은 자꾸 달음질 치고 있지 않은가.
“어어, 기제냐? 야, 나 항암 끊었다. 아 글쎄 머리가 빠지잖아. 입맛도 없어지고. 다음 달에 이상구 박사 세미나에 가기로 했다. 돈 걱정 마라. 내가 등록 할테니까.”
내가 먼저 전화 하기를 잘했다. 우리 둘 사이에 무슨 밀고 당김이 필요하다고 그런 고집을 부렸을까 미안하기만 했다. 난 그저 오빠가 살아만 있어주면 좋겠다. 돈이야 있는 사람 꺼 나눠 쓰면 되고, 한국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빠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만 하다.
수술 몇 달 후 검진에서 암세포 전멸이라는 진단 받고, 껄껄대며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담배 피고, 자유롭게 일 년 살았는데, 뭐 쪼끄만 게 또 생겼단다. 당장 항암치료 받으라고 의사가 호출이지만 안 하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이다. 오빠의 생활 습관이 바뀌기를 바라며, 건강한 사람에게도 암세포는 존재한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오빠에게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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