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가촌, 내가 살던 그 옛집

2019.04.22 11:20

김학 조회 수:15

牧歌村, 내가 살던 그 옛집

김 학

내가 10년이나 살았던 옛집이 식당으로 변했다. 이름하여 목가촌(牧歌村).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내가 손수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어서 10년 동안 온가족이 오순도순 살았던 그 집. 국민학생이던 아이들이 탈없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던 그 집. 살림이 조금씩 불어나서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그 집. 여섯 식구가 건강하고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던 그 집. 『호호부인(好好婦人)』아란 다섯 번째 수필집을 펴냈고, 여러 개의 문학상을 받기도 했던 그 집. 봄이면 갖가지 꽃을 피워주고 가을이면 푸짐한 과일을 영글게 해주던 그 집. 그처럼 자랑스럽고 정겨웠던 그 집이 목가촌이란 상호를 내걸고 손님을 맞는다.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 3가 748-6.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정든 옛집의 주소다. 10년이나 살았는데 그 집에서 나의 흔적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능소화와 등나무 줄기가 뒤덮었던 대문과 장미가 고개를 내밀던 담장마저 헐리고 화단도 반쪽으로 줄어들었다. 내가 정성들여 가꿨던 정원수들도 어디론가 이민을 보내버렸다. 그 집에 들어서면 어쩐지 생경한 기분에 젖는다. 주인아주머니와 종업원들이 활짝 웃으며 반겨주지만 어인일인지 마음은 허허롭다.

내가 밤을 밝히며 원고와 씨름하던 서재에서도, 아이들이 책과 씨름하던 공부방에서도, 신혼부부가 세들어 살던 2층방에서도, 손님들은 술잔을 기울이거나 허기를 달랜다. 옛날 이 방에서 누가 살았던가는 그들이 알 수도 또 알 필요도 없다.

목가촌! 낭만적이며 서정적인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는 예술가들의 사랑방 냄새가 묻어난다. 금세 석정 시인의 시 한 수라도 읊어야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금은 가을,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또 봄을 맞게 될 것이다. 지난 봄, 아직 내가 그 집에서 살 때 나는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다.

“시장 우리 집 뜨락에서는 봄의 축제가 열리고 있다. 담장가에서는 개나리가 노오란 웃음을 머금은 채 울 밖을 내다보려 바둥거리고 있고, 백목련은 어느새 함박웃음을 거두었다. 홍도화나 밥풀 꽃은 핏빛 미소를 깨물고 있으며, 라일락과 영산홍 그리고 모란과 왕벚꽃 그밖에 등나무도 제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내려 벼르고 있다. 봄부터 시작된 우리 집 뜨락에서 베풀어지는 봄의 축제는 가을까지 이어질 것이다.

파릇파릇 새로 돋아난 잎새들도 정겹고, 분주히 날아다니는 벌‧나비들의 윤무도 그림처럼 곱다. 새들마저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청아한 목소리로 봄노래를 뽑아대니 절로 흥결이 돋는 나날이다.

거실의 소파에 앉아 망연히 뜨락을 내다보는 즐거움 끝에는 언제나 허허로움이 동반한다.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한 큰아들과 더불어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문을 펼쳐든다. 오늘도 지면에서는 찬바람이 인다.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을 준다. 그 역시 다를 바 없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던가? 자연의 봄은 어김없이 기름진 대지에 찬란한 봄을 수놓고 있지만, 우리네 마음에는 칼날 같은 찬바람이 휘젓는다. 사람들은 잡초처럼 넙죽 엎드려 칼날을 피하려든다. 사정한파라는 그 칼바람을…. 이제야말로 죄짓고는 못 사는 세상이 되려나 보다. 언젠가 큰아들이 보내준 대학신문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부장축재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선배들의 빛나는 투기를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부의 축적과 향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땅 투기와 재산증식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검은 돈의 지표로 삼는다. 술수의 마음가짐과 권모를 지니고 투기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우리의 처지를 부정축재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드높인다.’

국민교육헌장을 빗대어 개작한 주정축재헌장이 오늘따라 마음을 짓누른다. 대학생들의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으이식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프다.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더 부끄럽다.”

한 나라의 집권자가 바뀌는 것은 한 집의 주인이 바뀌는 것과 다를 바 없으려니 싶다. 나 같은 필부로서는 후자의 경우가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새 주인이 집의 구조를 뜯어 고치고 용도를 변경하며 환경을 재 정비하는 것은 그의 철학과 취향에 따라서 하는 일이다. 감히 옛 주인인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한 나라의 집권자의 경우도 그러려니 싶다.

나의 옛집이 내가 살던 시절처럼 봄의 축제를 기대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목가촌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쉼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또 그에 못지않게 내가 사랑하는 이 나라도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그런 집권자가 무궁토록 이어가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학생들의 부정축재헌장이 흘러간 옛이야기일 뿐 아니라 암울하던 시절의 한낱 삽화였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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