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2 14:16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매창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 종 희
‘기생 시인 매창’하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전북 부안이 낳은 매창(梅窓, 1573~1610)은 송도의 황진이에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할 만큼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조선의 천민출신 유희경劉希慶,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 인조반정의 공신 이귀李貴 등과 많은 문인, 관료들과 교유했다.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난 미천한 신분임에도 당대의 학자들과 교분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은 그녀의 시를 모은 ‘매창집梅窓集’에 있었다.
당대의 명성 높은 학자들과 주고받은 시 중에서도 천민출신 유희경과 사랑을 나누며 남긴 시는 구구절절이 애틋하다. 유희경(1545~1636)은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에 강화에서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92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촌은집村隱集’에는 천얼賤孼이라고 명기되어 있는데, 첩 소생인 서자도 아니고 비첩婢妾과의 사이에서 낳은 신분이었다. 조선조에서 살아가기 힘든 신분이지만, 성리학을 기본으로 한 문치文治주의의 사회였기에 사대부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유희경의 나이 46세 때, 남도를 유랑하다가 말로만 전해 들은 18세 꽃다운 매창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만남의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벅차오르는 기쁨을 표현한 시가 ‘증계랑贈癸娘’이다. 즉 매창의 또 다른 이름 계랑에게 바친다는 시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 이름 들어 알고 있었네. 曾聞南國癸娘名
시 재주와 노래 솜씨 장안까지 울려 퍼졌는데 詩韻歌詞動洛城
오늘에야 그 진면목 서로 마주하고 보니 今日相看眞面目
마치 선녀가 천상에서 내려온 것 같구나 却疑神女下三淸
천민출신과 기생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서일까?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조화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깊은 사랑에 빠져들어 매창이 아래와 같이 화답하였다.
내게는 오래전 연주하는 거문고 있고 我有古奏箏
한번 타면 온갖 정감들이 일어나네 一彈百感生
세상에서 이 곡을 알아줄 이가 없더니 世爲知此曲
비로소 임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보네 遙和俱山笙
매창의 거문고 연주재능이 유희경의 시와 어울리게 되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 두 사람 간 28년의 나이 차가 무슨 대수겠는가. ‘천얼’이면 어떻고, ‘기생’이면 어떻겠는가. 밤 깊은 줄 모르고 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원앙금침에 누워 운우지정雲雨之情에 빠져들게 되었다. 평생 연애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나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은근히 질투심도 났다. 유희경과 같이 시문에 뛰어났으면? 매창과 같이 시문에 거문고까지 출중한 재능을 겸비했더라면? 내가 자란 환경은 감히 엄두도 낼 형편이 아니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으니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은 두 사람을 갈라놓기에 이른다. 승병이니, 의병으로 의연히 구국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유희경도 구국의 대열에 동참하면서 매창과 헤어지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왜란이 평정되고 전공에 따라 비복婢僕들에게도 면천免賤을 해주게 되었는데 정 3품 통정대부 벼슬을 내려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었으니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노부모에 외아들과 가난이라는 환경을 비관하며 좌절했던 철없던 생각이 난다. 비첩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천얼신분을의 한을 면하고자 전쟁에 참여한 유희경의 인생철학을 흠모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은 자신이 개척해 가야 할 테지만, 부모에게 의지하려는 나약한 젊은이들이 한 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유희경과 이별의 아픔을 달래면서 매창의 대표적인 시조 ‘이화우梨花雨’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배나무꽃 비처럼 흩날릴 때 울며 붙잡고 이별한 님께서 가을바람에 낙엽 질 때 그분도 나를 생각할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유희경을 배꽃 필 때 떠나보내고 낙엽이 된 가을, 즉 시공을 초월한 시심은 두 사람만의 그리움과 사랑의 절정을 이룬 시조다.
매창이 당대 최고의 인물들과 교유한 것을 보면 그녀의 재주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얼이라고 자칭한 유희경의 글 솜씨의 비범함과 신분상승을 위한 의지를 읽은 매창의 혜안이 더욱 돋보인다. 비록 천민 신분이지만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양반들과 풍류를 나누었으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으니 가히 여걸이라 불릴 만 한 인물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고전문학의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매창이 부안 출신이라니 전북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는다.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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