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받은 서재

2019.10.11 05:43

신효선 조회 수:4

임대받은 서재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신효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다. 50여 년 전 단발머리 학창시절, 벽면을 책장으로 채우고 안락의자에 앉아 음악을 켜놓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을 로망이다.

  중학교 때는 『학원』을, 고등학교 때는 『여학생』을 탐독하며 문학소녀의 꿈을 키웠다. 그 시절 시골에서 서재를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작은 방이라도 혼자서 사용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집에서 직장에 다니는 동안 둘째 오빠가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려 나가는 바람에 그 방을 내가 독차지하여 서재로 꾸미기로 마음먹었다. 오빠가 쓰던 침대까지 물려받게 되어 더욱더 좋았다. 나는 책 욕심이 많았다. 침대 옆에 책장을 놓고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소월시집을 비롯해 세계명시전집, 세계문학전집 등 방안의 모든 벽을 책으로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겨우 한 쪽 벽만 채우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열심히 모았다. 어쩌면 책을 읽는 즐거움보다는 책을 모으고, 책장에 쌓이는 책을 보는 즐거움이 더 컸으리라.

  그 당시에는 책을 판매하는 샐러리맨이 사무실로 찾아다니면서 월부로 책을 판매했다. 그런데 판매원이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 올 때 마다 나를 찾았다. 작은 고을에서 책을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런 것 같다. 판매원이 찾아오면 웬만하면 책을 사고 주문도 했었다. 부지런히 책을 모아 서재를 장식하고 싶었다.

  어느 때는 월부 책값을 갚다 보면 내 월급으로는 혼자의 생활비도 부족해 아버지한테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는 나의 방으로 오셔서 이 많은 책을 다 읽었냐고 물으셨다.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려가며 얼렁뚱땅 책값을 받아냈다. 책값은 들어도 아버지는 책을 사 나르는 나를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매사에 자식 일이라면 아는 듯 모르는 듯 믿어주시던 아버지가 지금에 와서도 고맙기만 하다.

  그때는 나의 작은 방은 침실이자, 음악 감상실이자, 서재로서 나의 행복발전소였다. 나는 책을 모으며 행복했고, 나의 꿈은 자라고 영글어 갔다. 서재라는 공간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곳임이 틀림없다.

  결혼할 때 많은 책을 가지고 갔다. 예단인 장롱, 살림살이보다 책장과 책이 나의 보물이었다. 결혼 후에는 빠듯한 가정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가계부를 부록으로 주는 『주부생활』 같은 월간지 외의 책은 거의 사지 않았다. 대학원 다니는 남편과 두 아이 뒷바라지, 거기다 나의 건강 때문에 책을 읽을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살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나는 소중한 나의 보물은 까마득히 잊은 채 책장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몇 번 이사하면서 귀한 보물이 두통거리가 되어 따라다녔다. 급기야는 광주에서 단독 주택에 살 때는 남편의 학교 연구실 책장 한쪽을 차지하기도 했다. 서재가 없으니 나의 가장 귀한 보물은 눈치꾸러기가 되었다.

  서재는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읽고 있는 책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어느 날 남편은 나의 책 일부를 학교에 기증하자고 말했다. 서운해 하는 나에게 오래된 책은 이제 누가 읽지도 않으니, 요즘 같으면 전자책의 보급으로 도서관에서도 소용없게 됐지만,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면 대학 평가에도 도움이 되고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며 나를 설득했다.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럴 듯해 그동안 책장에 갇혀만 있던 나의 보물 일부와 이별을 해야 했다.

  광주에서 전주로 이사를 오면서도 많은 책을 처분하고 왔지만, 책 속에 묻혀 산 남편인지라, 남편의 책과 아까워 기증하지 않은 책들이 이삿짐을 많이 차지했다. 전주에 와서도 나의 책은 남편의 서재 한쪽을 차지하는 임대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내가 수필공부를 하다 보니 자꾸 불어나는 책들 때문에 옛것을 정리하기로 했다. 세계문학전집, 시집, 각종 서적과 남편의 손때가 묻은 책들도 과감하게 정리하여 폐지 수집하는 아저씨한테 주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나의 서재를 따로 꾸민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고 사치인 것 같았다. 설령 나의 서재를 차린다 해도 제 몫을 할 자신이 없어, 이번에도 남편의 서재를 부분적으로 무상 임대받기로 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새로 사들여 안방에 설치하고 나의 서재로 대신하기로 했다.

  남편은 책장을 몇 차례 정리하면서 전공 서적은 사진과 여행 책으로 바뀌어 가고, 나의 수필 관련 책으로 채워지고 있다. 비록 나만의 서재는 없을지라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서재가 있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책상과 컴퓨터가 있다. 작업하다 지치면 맘껏 쉴 수 있는 침대가 가까이 있어,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으니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2019.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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