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모종

2019.10.14 17:49

이형숙 조회 수:41

고추 모종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이형숙  

 

 

 

 

  

  빨간 고추가 하늘을 마주했다. 밭에서 나고 자라 부지런히 몸을 키우던 고추가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돋자리에 누웠다. 땅을 향한 채 쏟아지던 햇볕과 소나기가 전부였던 날들은 차마 올려다 볼 수 없었던 하늘이다. 떠다니는 조각구름이 경이롭고 눈부시다. 바닷가 아이가 수평선 너머의 세상을 그리듯 구름이 가는 먼 곳을 꿈꾼다.

  지난봄, 초록으로 넘실대는 고향을 아련하게 그리곤 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풋고추와 호박, 깻잎이 지천인 그곳을 떠올리곤 했다. 고향에 갔던 날, 여러 종류 모종들이 즐비한 종묘상 앞에서, 물만 잘 주면 여름내 싱싱한 고추를 따 먹을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내 손으로 풋고추를 심고 키워보리라 마음먹었다. 싱싱하게 자란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녀의 널찍한 베란다에는 봄이 오면 풋고추와 상추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음이 푸근하고 덩치도 큰 그녀는 지난해 초여름에도 금방 따온 풋고추를 식탁에 올려 점심을 차려주었다. 몇 개 되지 않은 풋고추가 얼마나 푸짐하게 느껴지던지….

  고추 모종 매운맛과 순한 맛 다섯 포기씩 열 포기를 사서 뿌리를 비닐로 싸서 종이가방에 넣고 서울로 가져 왔다. 어디를 가도 모종을 구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은 나고 자란 곳 음식을 찾게 마련이다. 내가 먹던 고추 맛이 아닐 것만 같았다. 길쭉하고 네모난 화분 2개와 꽃삽, 물뿌리개를 준비하고 대형마트에서 흙5 킬로그램 2봉지를 샀다. 시멘트로만 둘러싸인 도시의 어디에서도 흙을 퍼 올 곳은 없었다.

 ”어떤 놈이 매운 놈인가?

 남편은 베란다를 들락거리는 내게 물었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남편은 밥상에 오를 풋고추와 된장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닷새가 지났는데 모종은 시들시들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가느다란 허리가 부러질 듯 가늘었다.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는 가을을 노래하며 시인들에게 영감을 선사하는데, 고추는 바라볼수록 그 가냘픈 몸으로 남아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일지 한숨짓게 했다. 보름이 지나면 뿌리가 안정되고 착지할 수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애써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노랗게 변하더니 매달린 잎들이 하나씩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보름도 채우지 못하고 여섯 포기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남겨 둔 흙 봉지를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나뭇잎을 썩힌 배양토’라 쓰여 있었다. 흙인지 거름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사다가 심은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실수였다. 발 붙이고 서야 할 땅을 스스로 가릴 줄 알고 힘들어했던 것을…. 살아 숨 쉬는 생명을 키워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은 네 포기를 흙을 바꾸고 분갈이를 해서 거실 안으로 들여놓았다. 베란다에 머무는 햇볕이 너무 뜨거운가 싶어 안으로 들여놓고 선풍기로 열기를 식혀 주었다. 남편은 아예 소파 옆에 데려다 놓고 생각날 때마다 물을 한 모금씩 부어주곤 했다.

 

  사과 농사를 30년 넘게 짓던 분이 고추 모종 세 판을 들여놓고 동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 귀동냥으로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뿌리가 땅에 무사히 착지하고 나면 며칠 후 줄기에서 알파벳 Y자 모양의 가지가 나오는데 그곳을 방아다리라고 부른다고 했다.

  기적처럼 그곳에 손톱만한 하얀 꽃이 피더니 고추랄 것도 없는 작은 열매 2개가 간신히 매달렸다. 열매를 얻은 기쁨보다는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해산의 고통이 아련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방아다리 고추는 매달리는 족족 따 버려야 고추가 잘 열린다고 했지만 차마 따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모종 네 포기는 거실 안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우리 부부와 함께 눈을 떴다. 자고 나면 쑥쑥 자라기를 바라며 들여다보기에 바빴지만, 열매를 더 맺지 못하고 온갖 보살핌과 관심을 저버린 채 점점 사위어 가고 말았다.

  친구의 베란다에 진초록색으로 윤기가 흐르던 풋고추와 그토록 어려운 일을 쉽다고 말했던 친구를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힘으로도 아들딸 다섯을 바르게 잘 키웠다. 사회생활을 착실히 해내는 아이들은 효자 효녀 노릇도 잘한다. 돌이켜 보니 친구의 자식 농사는 방목이었다. 매어 놓지 않고 풀어놓은 가축들은 넓은 공간에서 신선한 것을 먹고 뛰놀며 활동 영역을 점차 넓히며 자란다. 초원을 달리다 뛰어넘을 수 없는 곳에 다다르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듯 될 때까지 반복해서 도전한다. 가야할 길을 확실하게 알고 더러는 길을 잃고 헤매지만 벗어나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다. 부모는 양의 무리를 지켜보는 목동처럼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인 것이다.

  해 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지만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그녀만의 자식 농사방법이었다. 혼자 힘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을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품안에 끼고 돌면 애 버린다.“며 오히려 안심시키곤 한다. 그녀의 베란다에서 튼튼하게 자란 고추는 불어오는 바람을 스스로 만질 수 있게 해 준 믿음과 지나치지 않은 관심이었다. 믿는 만큼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빨간 고추가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머금었던 물기를 내뱉는다. 길쭉한 주머니 속 노란 동전이 사그락 사그락 겨울 아침 눈 밟는 소리를 낼 때까지 더 붉고 더 투명하게 거듭나야 하리라. 놓쳐버린 고추 모종 열 포기가 상실감으로 남는다. 내년에는 고향의 흙을 퍼다가 다시 도전해 볼 참이다. 아직도 배우고 익히며 살아가야 할 길이 아득히 멀기만 하다.

                                                             (2019.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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