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어투

2019.10.20 21:31

김성은 조회 수:10

선생님과 어투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김성은

 

 

 

 

 눈이 아닌 귀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 나는 상대의 어투에서 진심을 가늠한다. 문득 지인들의 어투를 생각해 봤다. 나와 유대 관계가 있는 이들은 대부분 어투가 상냥하다. 표정을 볼 수 없는 내 입장을 십분 배려한 그들의 예의일 때도 많지만 웃음이 묻어 있는 얼굴이 환하게 그려지는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대부분이다. 눈빛은 꾸며낼 수 없지만 어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 맹점이라면 맹점일까?

 

 중학교를 졸업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어투’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선생님이 두 분 계신다. 한 분은 중학교 1학년 때 생물 선생님이셨고, 한 분은 중학교 3학년 때 물상 선생님이셨다. 나는 서울 목동에서 일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맹학교 중등부에 입학하여 모든 환경이 낯설 때 생물 선생님의 독특한 수업은 소리에 민감한 우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저명한 학자인 도올 김용옥 교수를 닮은 듯한 열정적인 톤으로 온몸의 기운을 쥐어 짜는 리듬이 재미있어 본의 아니게 수업에 집중했다. 당시 학습 내용은 해조류와 해초류에 관한 것이었는데, 선생님이 목청껏 소리 지르며 노래처럼 흥얼거리신 내용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미역, 다시마, 모자반, 톳”

 물상 선생님은 특수학교 근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속도가 매우 느리면서 뜸을 길게 들였다. ‘어떠한’을 꼭 ‘어떠러한’으로 발음하셨는데, 우리는 그 특이한 어투를 흉내내는 것이 재미있어 선생님 말씀을 따라 했다. 앵무새처럼 반복하다 보니 학습 내용이 절로 외워졌다.

 시험 기간이었다. 물상 선생님께서 과학실로 나를 부르셨다. 점자 답안지를 채점하라고 하시며 동료 선생님들과 담소를 나누시는데 나는 내심 깜짝 놀랐다. 선생님의 어투가 수업 시간과는 확연히 다른 게 아닌가? 지극히 평범했다. 채점을 마치고 선생님이 주신 점자지를 한 뭉치 받아 교실로 돌아왔다. 나는 친구들에게 빅 뉴스라며 물상 선생님 어투가 다르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대박! 나일주 선생님. 선생님들끼리 얘기할 땐 말투가 완전 정상이야.

 

 특수교사가 되고 나는 종종 물상 선생님을 떠올렸다. 일반 학교에서 비장애 학생들만 가르치던 선생님이 얼마나 고심하고 연구한 끝에 그 어투를 만드셨을까?

맹학생들의 특징을 파악하여 그것을 수업에 반영하신 선생님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실수로라도 교실에서는 선생님 개인의 어투를 쓰지 않으신 철칙도 놀라웠다. 눈으로 점자를 줄줄 읽으셨던 국사 선생님, 지성과 미모로 뭇 남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영어 선생님, 충청도 사투리로 구수하게 “옥수수 감춰.”하시던 체육 선생님은 모두 건강하실까?

 17년차 특수교사로 일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물상 선생님 같은 교사를 만나지 못했다맹학생들 말 많고, 고집 세고, 이기적이라는 푸념은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만 그들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고민하고 연구하는 비장애인 교사는 드물었다. 어찌 비단 교사뿐이겠는가?

 

 원만한 사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숙하고 노련한 표정과 어투 관리가 필수다. 생물 선생님의 독특한 어투는 특수교사인 내게 해초류에 대한 지식을 넘어 교사로서의 교수 연구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긴 세월을 뛰어 넘는 생생한 기억은 선생님들의 어투에서 비롯됐다.

 앞을 볼 수 없는 탓에 유난히 목소리에 집착하는 성향이 어쩌면 함정일지 모르지만, 내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상대의 마음은 감출 수 없는 진짜라고 믿는다. 내 어투를 점검해 봤다. 가까운 사람에게일수록 건조하고 무심했다. 나는 어떤 선생님으로 학생들 기억에 남을까? 좁은 관계망에서 내 어투는 상대에게 칼이었을까, 약이었을까?

                                                                                        (2019.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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