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세뱃돈

2019.11.13 16:20

구연식 조회 수:21

어머니의 세뱃돈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내 지갑 한쪽에는 꼬깃꼬깃 접은 만원 권 한 장이 벌써 15년째 부적처럼 지키고 있다. 생전에 어머니가 세뱃돈으로 주신 만 원권 중 한 장이다. 그간 지갑은 서너 번 새것으로 바꾸었어도 지갑지킴이 만원 권은 그대로다. 설날 아침 자손들의 세배를 받고 특히 고사리같이 귀엽고 예쁜 손자들의 손에 세뱃돈을 나누어주는 기쁨은 그렇게도 흐뭇하다.

 

 내 어린 시절 세뱃돈은 없었고, 설날이 돌아오면 차례상을 물리고 그 자리에서 웃어른에게 세배를 드렸다. 성묘하고 어른들은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나이 드신 동네 노인들 집을 찾아가 세배를 올리고 세찬(歲饌)을 먹으며 덕담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다. 세뱃돈의 유래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 우리의 전통은 음식대접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설의 세시풍속은 많이도 달라졌다. 세배는커녕 제사도 안 지내는 풍속으로 변해가니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무색하다. 어린이들의 세배모습은 귀엽기도 하지만, 세태에 따라 변하여 세배의 목적이 어른 공경보다는 세뱃돈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세배하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쳐다보면서 세뱃돈 지참여부를 계속 살펴보며 머리를 숙여 절하는 순간까지 눈은 세뱃돈의 미련을 떨치지를 못한다. 이제는 내가 할아버지로 바뀌어서 손자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세뱃돈 준비를 해야 한다. 돈 없으면 할아버지 노릇도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가 주신 세뱃돈은 오랜 세월 지갑 속에서 얼마나 부대꼈는지 모서리는 닳아서 작은 실 구멍이 보인다. 아무리 비상금이 바닥 나도 어머니의 세뱃돈은 지켰다. 외출 시에는 나의 심장 위에서 같이 살아서 움직이는 어머니의 징표이기 때문에 언제나 든든하고, 감사하다. ‘올해도 건강하고 가내 만사형통하기를 바란다.’면서 세뱃돈을 주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이제는 어디를 가야 뵈올 수 있는지, 기껏해야 삭망이나 성묘 그것으로 생색을 내는 것 같아 어머니의 회초리로 맞아야 철이 들 것 같다.

 

 어머니는 평소 약간의 농가 소득과 자식들이 드린 용돈으로 생활을 하셨다. 그래서 설날 세뱃돈은 자식들이 평소에 드린 용돈을 모아서 다시 자손들에게 되돌려 준 셈이다. 그래도 어머니의 품속에서 머물다가 주신 세뱃돈이니 어머니의 체온이 그대로 느껴지고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오래 전부터 어머니의 세뱃돈을 지갑 안쪽에 담고 외출할 때마다 부적처럼 간직하고 다니는 것은 부부도, 형제도, 부자간도 모른다. 다만 이 글을 읽어줄 독자들만 안다. 언제인가 직원들과 하계연수 때 강원도 동강에서 래프팅 놀이를 했다. 얄궂은 래프팅 조교가 여러 번 보트를 뒤집는 바람에 온몸이 물에 젖었다. 목적지에 내려서 소지품들을 점검해 보니 종이류는 죽이 되었고, 가죽 혁대도, 가죽 지갑도 물에 탱탱 불어 형태가 뒤틀어져 있었다. 물에 불은 지갑을 열어보니 어머니의 세뱃돈은 지갑 안쪽 구석에 달라붙어 용케도 제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신기하기도 했다.

 

 한국조폐공사에서 지폐를 만들 때는 자연의 여러 가지 물리적 현상을 대비하여 제작하였겠지만, 접어진 지폐의 모서리는 세월처럼 닳아지고 있다. 어머니의 모습이 닳아서 사그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금 더 오래 보관하고 휴대하기 위해서는 얇은 비닐로 포장하고 다녀야겠다. 인공위성이 날고 최첨단 의료과학이 생로병사를 좌우하는 세상에 석기시대의 생각으로 살아간다고옹졸한 꽁생원으로 보일 테지만 나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신앙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어머니의 세뱃돈은 일확천금이 아니어도 좋다. 작은 씨앗의 싹 트임으로 자손들한테는 마음의 양식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절대자의 영험을 대신하여 모든 두려움을 떨칠 부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집을 나설 때 어머니와 동행한다는 든든함이 있다. 많은 사람의 지갑에서 돈은 마를 수 있어도 나의 지갑 속 세뱃돈은 마를 수 없다.

 

 염량(炎凉)이 때를 알아 벌써 입동이 지나서인지 조석으로 손끝이 시리다. 자손들이 찾아올 때 옷가지를 보고 때를 짐작하며 더위도 추위도 모르고 누워 계시는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저린다. 어머니 산소길 응달쪽에는 서릿발이 땅 껍질을 받치고 있다. 그 위에 고라니 모자가 걸어간 발자국이 움푹움푹 팬 곳에는 새끼 고라니 똥이 듬성듬성 따라 올라갔다. 고라니 새끼가 작은 꼬리를 흔들며 어미 뒤를 아장아장 따라 올라갔을 모습이 그리도 부럽다. 나는 어머니 세뱃돈 지갑을 가슴에 품고 소주병과 안주 달랑 들고 어머니 산소 길을 오르고 있다.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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