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극장

2020.01.29 13:28

구연식 조회 수:74

가설극장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구연식

 

 

 

 인간의 문화 향유는 삶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하는 활력소이다. 특히 유년기의 색다른 문화소재 접촉과 취향에 따른 문화유형의 선택은 성장하면서 취미로 쌓여서 특기로 나타난다. 성인기에는 사회진출의 발판이 되어 직업 선택과 그로 인한 인간관계를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는 학습과 경험 그리고 모방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 과정을 공통분모로 하는 것은 문화활동이다.

 

 나의 유년 시절 시골에는 전기 음향기기는 전혀 없었다. 막내 숙부 댁에는 거미집 같은 안테나를 장대 끝에 고정하고 더 높은 곳 깨죽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근거리 전파만 수신이 한정되어 있던 광석라디오가 있었다. 전력 없이 작동되므로 감도가 약하여 소리는 모깃소리 정도로 작은 데다 잡음도 많았어도 나에게는 신비로운 물건이었다. 내가 막내 작은집 가는 이유를 작은아버지는 용케도 알아차리시고 윗방의 광석라디오 수화기를 내주시며 듣도록 해주셨다.

 

 큰아버지 댁은 아버지 형제 중에서 그래도 생활이 제일 윤택했는지 작은아버지 댁의 광석라디오보다는 몇 년쯤 뒤에 나왔지마는 나에게는 요술 상자가 있었다. 옛날 영어사전 크기에 불그스레한 가죽을 입혀 만든 고급스러운 금성사에서 출시된 트랜지스터(transistor)라디오가 있었다. 그때부터는 작은집에서 큰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파 수신도 여러 방송이 가능했고 음향도 좋아서 많은 사람이 동시에 청취할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저녁 식사만 마치면 큰집 안방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주로 듣는 프로그램은 연속방송극이었다. 라디오 속 성우들은 한결같이 목소리도 곱고, 드라마 가족 간에 존대하는 말투가 그렇게도 좋았다. 큰집 식구들은 논·밭일에 지쳐서 벌써 곯아떨어졌는데 나와 이웃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라디오 드라마에 귀를 떼지 못했으니 얼마나 염치없던 사람들이었던가?

 

 내가 다니던 금마초등학교는 60여 년 전에 외곽지역으로 이전했다. 그 자리에는 금마시장이 확장되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는 대부분 학교 강당이 없어서 교실 3칸 정도를 막거나 터놓을 수 있는 장치를 하여 입학식, 졸업식 등 학교행사를 치렀다. 그런데 초등학교가 이전하면서 어떤 민간업자가 강당식 교실을 인수하여 가설극장을 운영했다. 어려서부터 라디오, 서커스, 신파극이 그렇게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가설극장에 걸어놓은 영화 포스터만 보면 가슴이 설렜었다. 영화 상영 오후쯤에는 허름한 트럭에 스피커를 달고 영화 포스터로 만든 샌드위치 광고를 뒤집어쓴 변사 아저씨가 마을마다 영화 선전을 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면민 여러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옥단춘을 상영합니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한바탕 벌집을 쑤셔 놓았다. 또래의 친구들은 벌써 마음이 들떠서 어떻게 해서든지 가설극장에 갈 궁리에 몰두하게 된다. 나는 어머니를 졸라서 가끔 영화 구경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줄거리를 어머니한테 이야기했다.

 

 언제인가 초등학교 겨울방학 때였다. 동네 사는 친구가 돈이 없어도 영화 구경을 할 수 있다고 꼬드겼다. 나는 솔깃하여 무엇이냐고 물으니, 영화 시작 두어 시간 전에 몰래 입장하여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영화가 시작하면 슬그머니 나가서 구경하면 된다고 했다. 나와 친구는 해가 동동할 때 아무도 없는 극장에 몰래 들어가서 화장실 한 칸에 둘이 들어갔다. 때는 엄청 추운 겨울이고 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닌 재래식 화장실로 마치 원두막 위에 바닥만 뚫어 놓은 그런 화장실이었다. 찬바람은 용케도 화장실 구멍으로 타고 올라와서 냄새와 추위로 사람을 괴롭혔다. 그래도 희망은 공짜로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니 추위와 냄새는 금방 잊어버렸다. 이렇게 1시간 이상을 덜덜 떨고 기다리는데, 극장 안에서 영화상영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어두컴컴한 극장 안을 더듬더듬 걸어 자리에 앉아서 시치미를 떼고 영화를 보았다. 누군가 오더니 나와 친구 윗도리 목덜미를 잡아 치켜세우며 어디론가 데리고 가서 다짜고짜 뺨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죄는 있어 맞으면서 얼굴을 보니 극장 기도 아저씨였다.

 "야 인마, 왜 도둑으로 들어왔어? 돈을 내든지, 나가든지 해!"

 호통을 쳤다. 그때 극장 안의 관객은 10명도 안 되어서 기도 아저씨는 화가 났었고, 숫자와 손님들까지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1시간 이상 화장실 안에서 고생한 보람도 없이 친구와 함께 눈길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 유년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는 전주 시내 육서점, 우체국, 상업은행 사거리에 있는 공보관에서 토요일 오후에는 무료 외화(外畵) 상영이 있었다. 나는 토요일 오후에 시골집 갈 때는 참새가 방앗간 코스였다. 대학 때는 가정교사로 번 돈으로는 광주 시내 개봉관 영화는 꼭 봐야 직성이 풀렸다. 이처럼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름의 영화광이었다. 그런 내가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15년 전 소피아 로렌,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가 주연한,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나섰는데, 방황하다가 겨우 찾은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다. 모든 것을 단념하고 떠나가는 여자, 떠나가는 기차 꼬리를 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남편을 내용으로 한 해바라기(Sunflower)가 기억된다. 이제는 집에서 TV 영화 채널을 활용하여 감상하고 있다.

 

 지금도 금마시장 모퉁이를 지나갈 때면 가설극장 지붕은 그대로 남아있다. 언제인가 시장 가는 길에 일부러 찾아가 보았더니, 이제는 농산물 창고로 쓰고 있었다. 덜덜 떨었던 화장실은 온데간데없다. 음식이 가장 맛있고 기억에 남는 것은 배부를 때 먹었던 음식이 아니고, 몇 끼를 굶고 허기졌을 때 먹었던 음식이 그렇게 맛이 있었다. 발동기로 전원을 공급하고 화면도 흐릿했던 가설극장의 영화가 생각난다.

                                                                   (202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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