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2020.01.30 18:49

곽창선 조회 수:77

 제주살이

       신아 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곽창선

 

 

 

 

 지난해 말 아내의 주선으로 한 달간의 제주살이를 체험했다. 제주 친지와 자주 안부를 주고 받더니 제주살이를 하고 싶다며 의향을 물었다. 성산포에 준비를 다 해놓았으니 따라만 가잔다. 마치 소풍 전날의 소녀 같이 서둘렀다. 갑작스런 제안에 선뜻 앞장서지 못했다.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려면 쉽지 않을 텐데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평소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하는 아내이니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12월 중순 간단히 짐을 챙겨 공항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제주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여객기가 결항될지 모른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정시에 비행기는 이륙하여 18시경에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요동치는 비행 끝에 힘겹게 트랩을 내리는데 또다시 세찬 바람에 시달려야 했다. 버스마저 연착하여 숙소에 도착하니 밤 9시가 지났다. 짧은 여행이건만 온 몸이 소금에 절여놓은 배추처럼 축 처진다. 바람과 곡예비행에 긴장한 탓인 것 같았다.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밖을 보니 칠흑의 밤바다에 별빛이 쏟아지고, 수평선 저 멀리 등대만이 외로이 깜박이고 있었다.

 

 피곤했던지 눈을 뜨니 아침 7시가 조금 넘었다. 방안 분위기가 낯설었다. 주방기구며 세탁기가 놓여 있고 벽에 매달린 TV모습이 생소하다. 오직 잠든 아내의 숨소리만이 친근하게 들릴 뿐이다. 여명의 시간이 지나며 베란다 창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하얗게 물보라지는 파도에 갈매기는 멋진 나래를 펴고, 바다는 서서히 어둠을 토해 내고 있었다. 지평선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뒤엉키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 빛에 도도하던 성산의 아침이 밝으니 신비경이다. 아, 무겁던 마음이 열리며 탄성이 튀어 나왔다. 방안에서 하늘빛에 붉게 물든 바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으니 어찌 아니 기쁠까?

 

 내 탄성에 잠이 깬 아내가 다가와 "참 멋진 풍경이네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힘찬 하이 파이브로 성산포 해역과 첫 인사를 나누었다. 부둣가 모래밭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불끈 솟아오르는 일출에 취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서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눈을 돌려 원룸 주위를 돌아보았다. 툭 터진 앞 바다, 좌로 100미터 거리에는 성산 일출봉이 우측엔 섭지코지 해변이 울타리처럼 둘러진 항아리 속 같은 곳이었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제주도살이 첫 아침을 맞이하게 되였다. 이것은 곧 아내의 로망이기도 했다.

 

 나에겐 지우고 싶은 여행의 추억이 있다. 수년 전 아내와 가까이 지내는 이주여성을 따라 필리핀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따라 나서 현지에서 지내려니 풍습과 의식주가 너무 달라서 무척이나 고생을 했었다. 또한 지난해 6월 한라산 철쭉제에서 아내가 부상을 당하는 등 여행에 트라우마가 남아 선뜻 앞장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칸방에서 빨래하고 밥해서 비록 김치에 된장국이지만 맛있게 먹고 지내며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니 인생사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았다.

 

 제주의 날씨는 북제주와 남제주의 기온 차가 심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나누어진 두 지역은 섭씨3-4도 차이가 난다. 북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한라산에 막혀 서귀포지역은 온화하고 바람도 세차지 않아 좋다. 그러나 제주와 성산은 날씨 변화가 무쌍하여 예측이 쉽지 않다. 연초 서귀포 기온이 섭씨 23도 가까웠는데 그래서 그런지 늘 푸른 시내 모습이 육지의 봄 풍경이었다. 동백꽃 모양을 한 먼 나무, 녹나무, 개나리, 철쭉도 피었다. 더욱 푸른 감귤 잎과 탐스럽게 익은 노란 감귤이 어우러져 딴 세상에 온 느낌이 들었다.

 

 제주를 흔히 유네스코 3관왕이라 부른다. 첫째가 세계자연유산이요, 둘째가 생물보전지역이며, 셋째가 지질공원핵심지질명소다. 이처럼 화산 하나가 유네스코 3관왕을 차지한 사례는 해외에도 없다니 복된 민족의 유산이다. 고교시절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자주 찾아오는 곳이지만, 찾을 때마다 생소한 기분이 든다. 스치고 지나치는 여행만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곳곳에 산재한 볼거리와 토속 음식을 맛보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시간을 가지고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보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승용차를 렌트할까도 했지만 부담 없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사전 준비를 한 계획에 따라, 버스운행 시간과 환승할 곳을 머리에 두고 간단한 간식을 챙겨 차에 오르면 그만이었다.

 오랜 시간을 거의 매일 순환버스에 의지하려니 피곤한 몸도 몸이지만 안전이 문제였다. 승하차시 잘못하면 낙상하기 쉬어, 아내의 손을 잡고 오르고 내렸다. 힐끗거리는 주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간지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섭지코지, 혼인지, 세 곳의 폭포, 비자림, 절물자연휴양림, 동굴, 우도, 성산일출, 마라도에서 짜장면도 맛보았고, 오랜만에 중문골프장, 강창학 파크 골프장도 들러 노년들이 즐기는 여유로움도 배웠다. 몸국, 보말국수, 성게 수제비, 참복 샤브샤브와 청보리, 감귤막걸리에 색 다른 맛을 두루 섭렵해 보았다.

 

 서귀포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백두산을 관람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 풍치와 어우러진 멋진 경기장이었다. 뒤로는 넉넉한 한라산이요, 옆에는 해군 기지가 보이고 저 멀리 마라도, 가파도가 바다위에  잘 그려 놓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더욱 놀란 것은 경기장 부대시설을 영화관, 닥종이박물관 등 여러 시설이 주민과 함께 호흡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느끼는 바가 컸다. 전국의 모든 유휴 시설들이 극적인 효용 가치를 창출할 묘안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좁은 공간에서의 생활은 달콤함보다 필요한 믿음을 키워 가는 시간이었다. 짧지 않은 외지 생활 속에서 지내려면 받으려는 마음보다 주는 마음을 배웠고,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전법戰法도 알았다. 여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면 가정의 평화도 지킬 수 있다는 지혜도 터득했다.

 

 이렇게 마음 편히 자연의 신비경을 두루 섭렵할 수 있어 무슨 복이 찾아 왔나 싶었다마땅치 않게 여겼던 아내의 때늦은 로망이 그 시작이었다. 물끄러미 아내를 보았다. 주름진 얼굴에, 백발이 어김없는 장모님의 말년 모습이었다. 시골에서 내외가 아옹다옹 사시면서 삼시 세끼를 거르는 법 없이 챙겨 주시고 새참에 막걸리로 장인을 보살피시던 모습, 아내는 그때 그 장모님 모습이었다. 아내는 고립무원의 나에게는 유일한 벗이요 둥지며 즐거움이다.

 

 오랜 기간 타지생활을 즐기려면 필수 조건으로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다. 또한 심정적 일체감 조성이 힐링의 지름길이다. 지내는 동안 서로 챙겨 가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하고 청소하며 나들이를 했다. 너무 짧게만 느껴진 시간이었다. 짐을 챙기며 주위를 살피니 곳곳에 정이 남아있었다.

                                                                     (2020.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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