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 수필의 키워드

2020.01.31 15:33

윤재천 조회 수:4

김학 수필의 키워드(2)/윤재천 [현대비평]
 

point.gif등록일 2007-05-12 10:58:56
point.gif조회수 2365회
 

나이테 하나 더 그려놓고 해야 할 일은 의욕을 충전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현 정권에서 노인들을 위해 대단한 일이나 할 것처럼 제시하는 대책이 겨우 돈 몇 푼 손에 쥐어주고 전철이나 공짜로 타게 하는 정도다. 노인들은 장차 사회발전의 골칫거리니 그 정도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 같아 씁쓰레할 때가 많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회의 주역으로서 기여한 세대임을 인정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기에, 분위기 쇄신을 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린애 취급을 하거나 밀려나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라고 내버려두면 그들은 폐기물처리장에 쌓아놓은 악취풍기는 쓰레기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춘향골 남원이 관광의 보고(寶庫)라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영국의 노팅검 성이    나 베로나 그리고 네덜란드의 오슈와 견줘보아도 결코 손색이 없는 곳이 바로 춘향골 남원이기 때    문이다. 베로나에 줄리엣의 무덤이 있듯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산기슭에는 춘향의 무덤이 있다. 오    슈에 달타니앙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듯이 춘향의 무덤 앞에는 ‘만고열녀 춘향지묘(萬古烈女 春香之    墓)’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노팅검 성에 로빈후드의 동상과 박물관이 있듯이 광한루원에는 춘향    사당과 춘향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네며 월매집도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고,    광한루 누각도 옛 모습 그대로다. 한 번 건너면 부부간의 금실이 좋아진다는 오작교(烏鵲橋)는 선남    선녀들의 발자국에 밟혀 이끼가 벗겨져 있고, 삼신산(三神山)의 대바람 소리에서는 이 도령과 춘향    의 밀어를 엿들을 수 있다.


                                                                     - 「꿈속의 춘향전」중에서




  고전소설 춘향전의 세계적인 보급과 이를 캐릭터로 한 상품을 보급하기를 우회적으로 제안하는 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알리기 위한 노력에 소홀하고, 돈벌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에서 맨 뒤에 ‘상업’을 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엇이든 만들어 파는 일은 돈을 밝히는 일이고, 점잖은 신분에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기피해왔던 것이 그동안의 통념처럼 되어 있었다. 이것이 대물림해온 가난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던 우리가 근대에 들어와서 무역대국으로 급성장한 것을 보면 만만찮은 저력을 가진 민족임에 틀림없다. 


  남북한 모두 정치가 국가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기에 정상적인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애정이 부족하고 이기적 욕망이 과다해서다. 못난 구석을 덜어내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괜찮을 텐데, 해본 적도 없고 할 능력도 없이 설쳐대고 있으니 갈수록 난장판이 되어가는 현실이다.


  상황이 바뀌면 그에 대항하는 태도도 이에 맞춰 변해야 한다. 꿈에서까지 열망을 드러내고 있는 소시민의 열정을 감안해서라도 개혁적인 자기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자기 변화’란 위정자의 쇄신적인 태도를 말함이다.




   농경사회 시절에는 경험이 풍부한 노인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 노인들은 더불어 성공과 실패    의 경험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많은 교훈을 줄 수가 있었다. 그 교훈이 소득    과도 연계가 되었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도 보탬이 되었으며, 원활한 인간관계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에는 노인들이 항상 존경의 대상으로서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다    르다. 노인들은 가정에서도 즐비한 가전제품 하나 마음대로 동작시키지 못한다. 행여 고장이나 나지    않을까 저어하여 작동을 꺼린다.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새롭게 개발된 갖가지 기기(器機)들이 등장하    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그러니 후배들이 손을 빌릴 수밖에 없고, 선배는 구경꾼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한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다.


                                                                  - 「그것이 알고 싶다」중에서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부족하지 않은 노후인가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이르는 글이다. 삶의 시간동안 끊임없이 묻고 대답해야 할 말이며 존재에 대한 자신의 확인이다. 존재론적 확증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욕을 상실해 생각조차 좌초되고 만다. 가치론이나 방법론은 이를 전제로 해서 가지를 뻗을 수밖에 없다. 작가는 존재론의 확증 - 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물자의 출현 현실에서 다가가 조작하여 그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현대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 딜레마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한발 한발 자연으로의 귀의를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나름의 특별한 재주가 있어 문명의 이기들을 잘 이용하여 그 혜택을 맘껏 누리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의 예이고 대부분은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일에 스며들 듯 빠져든다.


  역리(逆理)보다는 순리(順理)에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스스로 현실에 순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는 버리는 시대란다.


   모시기가 싫어서, 해외이민을 가려고 노부모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양로원이나, 기도원에    다 버리기도 하고, 관광지의 복잡한 길거리에다 버리기도 한단다. 구로지감(劬勞之感)을 잊은 채 쓰    레기 버리듯 부모를 버린단다. 부모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대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석    가모니의 가르침은 불경 속에서 낮잠을 자는 것일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고 깨우쳐 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나날이 늘어가는 교회의 신축공사장에 매몰되어버린 것일까. 자    식을 길러보면 부모의 노고를 알 수 있다는 유교의 교훈을 현대에 통용될 수 없는 구두선(口頭禪)일    까.


                                                             - 「버릴 줄만 아는 사람들」중에서




  챙겨 지니기보다 버리는 일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버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생활공간이 이전에 비해 협소해진 것이 그 이유다. 전에는 허드레 한 물건을 따로 모아놓을 수 있는 광도 있고, 당장 쓸 필요가 없는 것은 따로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버리는 것을 낭비로 생각했으나, 지금은 좁고 짜여진 공간에서 생활하다보니 자연히 변해, 핵가족화 된 오늘의 현실을 만들어놓았다.


  핵가족은 부부중심의 가족체계이다 보니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버려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다. 흔히 노인문제의 발생이 이런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면 제도에 손질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전의 가족체계로의 복귀가 가능한 일일까. 또 한번의 부작용에 따른 난리를 피워야만 약간의 기대나마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일은 쉽지 않아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하며 형성된 것이 오늘의 가족체계인 만큼 다시 농사를 지으며 살지 않는 한, 전과 같은 가족체계로의 전환은 확보할 명분을 기대할 수 없다.


  문제는 진정한 정(情)의 회복 - 완전한 복구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정을 끈으로 해서 결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버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세계 도처에서 가는 천 년을 정리하는 해넘이(日沒) 행사와 오는 천 년을 맞이하는 해돋이(日出)     행사로 떠들썩하였다. 열정적인 사람들은 해넘이 축제를 거쳐 해돋이 현장으로 달려가, 장엄하게 동    녘에서 떠오를 새 천 년의 첫날 아침 해를 우러르며 소원성취를 빌었을 테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안방에서 가족과 더불어 ‘세계로 열린 창’인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새 천 년 맞이 축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배고파하는 북녘동포를 잠시 잊고, 들뜬 축제와 더불어 환호작약했을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태양이라 하더라도 온 세상을 그늘 없이 햇볕으로만 출렁거리게 할 수는 없다. 양    지는 음지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새 천 년에도 이러한 이치가 달라지지는 않을 줄 안    다.


                                                                      - 「사람 같은 놈」중에서




  여기서의 ‘사람 같은 놈’은 ‘개’를 가리킨다.


  그만큼 개가 영특함을 말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원래 개는 늑대 과에 속하는 야성(野性) - 수성(獸性)이 강한 짐승이었으나 사람의 손에 의해 길들여지는 사이 본성이 순화되어 사람과 친숙해져 그 선호에 있어 1위를 차지하는 애완동물이 되었다.


  개는 사람들의 삶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들의 보호 아래 생활하는 특혜를 누리고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 단적인 예가 ‘개 팔자’라는 말이다. 지나칠 만큼 보살핌을 받아 사람보다 오히려 삶의 질이 나아져 이를 풍자 하는 말이다. 요즘같이 사람 사이의 존재하던 정이 강퍅해져 서로 등을 돌리고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개는 더 각광을 받고 있다.


  작가는 개의 행동이 의리 없는 사람보다 몇 배 더 인간적임을 입증하기 위해 전북 임실군에서 전해 내려오는 의견(義犬)의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개는 ‘사람 같은 놈’의 증표로 삼아도 부족하지가 않다. 술에 취해 쓰러져 불에 타 죽을 위기에 몰린 주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여 주인을 살린 점에서 그렇다. 이는 인간의 이기적인 작태를 비난하기 위한 힐난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선 언제 어디서나 독기를 품고 대들거나 힘입어 살던 상대를 궁지로 밀어 넣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다.


  


  오늘은 실로 반 년 만에 되찾은 일요일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목욕탕에 다녀오니 심신이 나른하     다. 느긋한 기분으로 낮잠을 즐기고 나니 점심 식사를 하란다. 세상이 온통 내 것인 양 살맛이 난     다. 그동안 나는 왜 이러한 여유를 잃고 서성거려야 했던가. 담배 한 개피를 빼어 물고 눈을 지그시    감으니 지나온 나의 발자국들이 돌이켜진다.




   소일거리를 찾으려고 눈동자를 굴린다. 책상 위에는 여기저기서 우송되어 온 동인지와 월간 문예    지들, 그리고 시집과 수필집, 평론집들이 즐비하다. 저마다 나의 선택을 기다리며 아양을 떤다. 3천    궁녀를 거느리고 산 의자왕의 기분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법도 하다. 문득 책 더미 속에서 나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게 있다. 몇 해 전 고등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는 친구 J로부터 얻은 역사책이     다.


                                                            - 「역사의 강물을 굽어보며」중에서




  한때, 국사를 강의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역사관을 피력하는 글이다.


  중국의 역사왜곡이 도를 잃고 있어 파문이 일고 있는 때라, 시의적절 함을 실감케 하는 작품이다. 무역대국이나 국제행사 유치니 하며 들떠 지내는 동안 우리는 약소민족으로 걸어온 역사를 잊고 있었고, 그런 불행한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난데없이 세계 3위의 대국이 될 것이니 하면서 소도 웃을 얘기만 늘어놓았으니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내실에 충실해야 하는데도,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를 못했다. 우선 위정자의 그릇됨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불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아무리 멋을 내려고 해도 결과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그 이유를 붙여 상황을 추슬러 보려고 해도 신망을 잃은 위정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공염불에 그치게 된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의 제1장이고, 역사를 통해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머리로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어 내려가야 그 진의에 도달할 수 있다. 지성이 아닌 감성으로 정복해야 할 것이지만, 우린 연대나 외우고 어느 위정자 뒤엔 누가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는 데만 주목하고 있다. 역사의 정상적인 역할이 진행되도록 힘을 모아 길을 열어갈 때, 비극의 수레바퀴는 멈춰질 수 있다.




   여름이 오면, 나도 아이들처럼 고향에 갈 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고향의 정, 조상의 숨결, 어린 날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으니 어찌 기다려지지 않으    랴. 한 여름에도 손이 시리던 호연정 그 옹달샘의 물맛은 시방도 변함이 없을까?


   고향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눈을 감으면 고향의 산하가 앨범처럼 펼쳐지고, 고향 사투리    가 귀에 잡히면 잊고 살던 고향의 그리운 얼굴들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다가선다. 꺼지지 않는 불씨    처럼 고향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기 마련이다.


                                                                - 「해마다 여름이 오면」중에서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발이라는 말이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 산중에까지 몰려들면서 우리는 실향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움이 없어지고 기다림이 메말라 곳곳에 앙상하게 널브러져 있는 형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고향은 이름만 다를 뿐 비슷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논길 사이엔 시내가 흐르고, 그곳엔 물고기가 살아 삶의 지루함을 잊게 해주었으며, 젊은이들보다는 늘그막의 어른들이 그늘진 자리를 차지하고 한담으로 날을 지내게 했으며 무슨 일이든지 거침없이 뜻을 피력하여 그 말이 두려워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프라이버시니 자존심이니 하는 말들이 들먹거리면서 그동안 모였던 자리에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고, 담의 높이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고향을 멀리하게 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서 외로움을 절실히 체험하기에 이르렀다.


  해마다 여름이 와도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휴가나 휴식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해외로 나가 벙어리로 떠도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고향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의 중국에서 공자님은 상점의 간판 하나 읽을 수 없으실 줄 압니다. 간판에 쓰여 진 한자(漢     字)가 옛날 공자님께서 사용하시던 그 시절의 그 한자가 아니라니까요. 어디 상점의 간판만 그런 줄    아세요? 관공서의 공문은 물론이요, 신문이나 텔레비전 그리고 컴퓨터와 갖가지 저술(著述)들마저     모두 간소화된 한자를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아무리 공자님이라 하더라도 재교육을 받지 않으면 그    중국 사회에서 적용하기 어려울 게 뻔해요. 어쩌면 문맹(文盲)으로 낙인이 찍히실 지도 모르겠던 걸    요?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 「공자님, 존경하는 공자님」중에서




‘공자님, 존경하는 공자님’이라는 제목으로 편지글의 형식을 빌어서 쓴 작품이다.


  어제의 공자는 오히려 중국 사람에겐 잊혀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요즘에 와선 조금씩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그들에겐 영웅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의 공자는 유별난 대우를 받고 있다.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글이 작가 김 학의 작품이다. 곳곳에 그를 기리는 애틋함이 배어있다. 이런 문화적 열정이 오늘의 한국을 떠받치고 있는 힘이 되고 있다. 힘을 응축시켜 방향만 잘 잡아 나가면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작가 김 학의 글은 공히 그 나름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근원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 나무의 뿌리에서 출산된 잎이고 줄기며 가지들이다. 이는 그가 좀처럼 호기(豪氣)를 부리지 않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예다. 그것이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아서이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다. 물 흘러가듯 흐르는 글이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만을 적시며 흐르는 맹물로서의 물줄기가 아니다. 자신의 가슴에 남아 있던 앙금을 지우려는 듯 풀어헤치며 흐른 물이기도 하고, 그리웠던 것을 찾아가 손이라도 잡아주고 도도히 흘러가는 물줄기에서 그의 글은 탄생되었다.


  작품이 지성과 감성이 적절히 융합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 큰 물줄기를 만들어낼 작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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