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멀어도

2020.02.16 23:46

신팔복 조회 수:10

길은 멀어도 /  신팔복

 

강원도 정선에 있는 민둥산은 억새꽃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산을 좋아해서 한 번은 꼭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어도 이곳 전주에서 찾아가기란 여간 교통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 기차를 타야할까 버스를 타야할까 무척 망설여졌다. 마침, 아내와 서울에서 손자를 돌보고 있었는데 기회가 왔다.

 

컴퓨터를 켜고 여행길을 검색했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을 가서 강변역에서 내렸다. 큰길을 건너 동서울터미널을 찾아가 정선행 버스를 탔다. 텔레비전에 나왔던 그 경치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버스는 경기도 양편, 강원도 횡성과 평창을 거쳐 정선으로 가는데 승객은 만원이었다. 차츰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 속으로 접어들었다. 1,000m가 넘는 치악산, 백덕산, 가리왕산 등이 솟아있는 준령을 돌아 여러 개의 길고 짧은 터널을 지났다. 길은 상상외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어쩌다 물줄기를 따라 평탄한 길로 가는 도중에 나타나는 마을은 단출했고 벼를 벤 좁은 논과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언덕배기 옥수수밭은 가을빛에 스산하게 보였다

  

알면 쉬운 일도 모르면 고생이다. 산으로 막혀버린 정선읍에 도착했는데 민둥산에 오르려면 민둥산역으로 가야 된다고 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가 군내버스를 타고 또 한 시간을 가서 민둥산역에 도착했다. 정선군 남면 무릉리 증산마을이었다. 오후도 절반이나 지났다. 산중이지만 맑은 지장천이 돌아나가고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로 증산초등학교, 증산보건진료소, 증산농공단지, 관광호텔, 여관, 음식점 등이 있었다. 폐장이 다 된 시장 골목을 지나 민둥산 등산길 초입에 설치한 억새축제장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곳 특산인 곤드레 밥상을 찾아갔다. 옛날식 건물에 비좁은 자리였지만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산나물과 양념간장을 넣어 비벼낸 곤드레 비빔밥을 처음으로 먹었다. 부드럽고 독특한 향과 깊은 맛이 있었다. 비빔밥을 좋아하는 아내도 맛있게 잘 먹었다.

 

다음날 일찍 증산초등학교 앞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두어 사람이 앞에 갔다. 처음부터 산길이 가팔라 힘이 들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데 어디서 왔는지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걸음을 재촉하며 앞서갔다. 오를수록 넓게 펼쳐 보이는 하늘은 맑았다. 붉은빛이 돋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쉼터를 만들어 주었다. 요즘 보기 드문 낙락장송이었다. 백 년도 넘게 이곳을 지켜왔을 것 같아 정감이 갔다. 대궐의 기둥감으로 충분해 보였다. 우리의 금수강산을 만든 소나무가 아닌가?

 

임도를 지나고 정상으로 가는 계단에 올랐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억새가 나불거리고 번번했다. 민둥산이었다. 절정기를 지났어도 등산길 양옆으로 잘 자란 억새가 고왔다. 새털구름이 펼쳐진 하늘과 억새꽃이 어우러져 뭇사람들을 반겨주었다. 해발 1,119m, 민둥산 억새 능선은 은빛 물결로 장관을 이뤘다. 확 트인 전망에 가슴 속까지 시원했다. 마치 타작한 볏단 속에 앉은 것 같았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등산객들이 환한 얼굴로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나도 아내와 활짝 웃으며 억새꽃 사진을 담았다. 내 고동색 등산복과 아내의 파란색이 잘 어울렸다. 정상의 돌비석 앞에서 꿈을 이룬 인증사진도 찍었다. 화왕산이나 오서산 억새밭보다 면적은 좁지만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엔 충분했다. 산이 다르니 경치도 달랐다.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높고 낮은 산들이 몰려있다. 산봉우리의 실루엣과 골짜기로 내려앉는 옅은 햇빛이 그려내는 진경산수는 곱고도 그윽해 보여 새삼 산이 좋았다.

 

억새꽃을 물결을 따라 주위를 돌다가 분화구처럼 움푹 파인 돌리네지형을 만났다. 강원도 석회암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이다. 세월과 기상(氣象)으로 빚어진 예술의 현장이라 감명 깊었다. 시간이 갈수록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더 머물고 싶었지만, 이곳 풍광을 가슴에 담아두고 미끄러지듯 가파른 길을 내려왔다.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지장천은 좔좔소리를 내며 급히도 흘러갔다. 하기야 영월 동강, 충주호, 한강을 지나 서해까지 먼 길을 가려면 바쁘기도 할 것이다. 세월처럼 쉼 없이 흘러만 간다.

 

민둥산역에서 1238분 기차를 기다렸다. 탄광 지대로 알려진 사북역에서 기차가 달려왔다. 청량리로 가는 기차다. 서울에선 기차로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가을에는 서울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특수를 잡으려고 축제도 한 달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20여 명이 기다리던 기차에 올랐다. 좌석은 거의 비었다. 기차는 덜컹대며 산굽이를 따라 좌우로 돌아나갔다. 여러 개의 터널을 통과했다. 터널이 없으면 정선도 없다 할 만큼 터널이 많았다. 깊은 산속을 빠져나와 너른 도시 제천역에서 내렸다. 다시 조치원을 거쳤고 대전역에서 내려 서대전역으로 와서 호남선을 타고 익산에 도착해 전라선으로 바꿔 탔다. 산에 오른 시간보다 차를 타는 시간이 무척 길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마루로 넘어가고 있다. 정선 민둥산은 정말 먼 길이었다. 고생한 만큼 민둥산의 추억도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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