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남매 표류기

2020.03.18 02:12

최정순 조회 수:1

일곱남매 표류기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최 정 순

 

 

  어머니 숟가락에 거북이가 그려져 있고 “천수를 누리소서!”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생판 거짓말이었다. 천수는커녕 환갑도 못 넘긴 쉰일곱에 홀연히 떠나셨다. 삼우제를 다녀온 뒤 치상 손님이 떠난 집안은 너무 괴괴하여 무서움마저 엄습했다. 이불을 들어낸 방바닥은 거뭇거뭇, 희미한 잔영 속에 어슴푸레 요위에 앉은 어머니의 모습이 희게 떠 보였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쌓여야 잊을 수 있을까?  

 

  엄벙덤벙 삼우제까지 치렀지만, 마음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다가 외딴섬에 갇힌 기분이었다. 나만 그럴까? 앞으로 일곱남매들이 어떤 예인선에 의해 항구에 닿을 것인가? 여태까지는 성치 못한 어머니가 말로라도 물꼬를 터 주셨다. 그러나 언제까지 능장코만 빠뜨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하지 않았던가? 이것저것 따질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와 인수인계는커녕 맏이라는 이유 하나로 동생들을 뭍으로 끌어올릴 예인선 선장이 되었다. 뭍으로 나오기까지, 항해사 면허증도 없는 선장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그러나 서로 밀고 끌며 뭍으로 나왔다. 이제부터는 각자의 표류기를 써야 한다.

 

  내 앞에 태어난 아들이 일찍 죽었다는 말을 어머니한테 들었다. 난생 처음으로 그 오빠가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 희망이라 하지 않던가? 세월이 좀먹는다 해도 시간은 흘렀다. 누가 보아도 희망의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천길만길 절망에 갇혀, 측은하게만 보였던 일곱남매들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희망처럼, 병아리가 씨암탉이 되어 알을 낳듯이, 이젠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만한 처지가 되었다. 엊그제 입학한 것 같은데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군대에 입대하더니 제대를 하고, 또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아마 이때가 인생 초년기를 맞은 일곱남매의 시련기가 아니었나 싶다. 세월아, 세월아, 어서어서 가거라. 세월이 겹쳐서 흘러가기를 바랐다.    

 

  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자식들인데도 아롱이다롱이였다. 둘째가 돌연변이라던데, 둘째동생은 결혼도 하기 전에 집 장만할 계획까지 세우더니 집을 장만하고 장가를 들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동생들은 제 머리를 잘도 깎았다. 입학한다고, 졸업하는 날이라고, 누구 하나 찾아가지 않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잘들 버텨냈다. 아는 언니 아들이 입대하여 훈련이 끝나서 자대배치 받는 날 어머니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혼자 울었다는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동생들은 좋은 배우자들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 분명히 하늘나라에 계신 하느님 같은 부모님의 보살핌이라 믿는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의 마지막 소원은 짝을 못 찾아준 자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혼을 시켜도 걱정 못 시켜도 걱정이라지만, 내가 살아보니 짝 찾아주는 일이 어려운 일이면서도 기쁜 일이다. 그래서 인륜지대사라 하지 않던가? 세월 앞에 어려웠던 고비를 다 잊었나 보다. 부모님의 마지막 소원인 막둥이까지 혼인도 하고 자식들도 낳아서 잘 키우고 사는 이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보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다.   

 

  만학도이였던 다섯째 동생 이야기다. 누나 집, 형 집에 얹혀살았다. 아무리 잘한다 해도 그 설움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그래도 둘째형 덕으로 중등교사가 되었다. “부모 복은 없는데 처가 복은 많다.”란 그 동생을 두고 한 말 같다. 만석꾼 집에서 혼인을 승낙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승낙이 떨어졌다. 동생의 사주(신랑의 생년·월·일·시)를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참 난감했다. 서러웠다고 해야 맞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한테 인수인계를 정확히 받아야 했었다. 내가 태어난 시도 아침밥 먹을 무렵이라고 어정쩡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 고비를 넘겼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장인 장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딸 셋을 장모님이 키워주셨다. 그 장모님이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중등학교 부부교사로 잘 살고 있으며 누나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동생이다. 누나가 지난날 서운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면 모두 잊어달라고 기도한다.

 

  이젠 동생들이 저마다 선장이 되었다. 자기 가정을 잘 건사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부모님 집을 찾아오면서 승낙받고 오는 자식은 없다. 내가 끝까지 좋은 선장으로 남는 길은 물꼬를 터주는 일이 아니라 흉허물없는 사이, 마음의 빗장을 열어 놓는 일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현관문 비밀번호도 풀었다.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부모님 집처럼 말이다. 행여 동생들한테 전화가 오면 첫마디가 “밥 먹었냐?”란 말이 튀어나온다. “시래깃국 끓여 놓을 테니 어서 오너라.” 이 한마디가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단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마치 길과 같아서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져서 길이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 희망이다.”란 루쉰의 말처럼, 누가 보아도 희망의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천길만길 절망에 갇혀, 측은하게만 보였던 일곱남매 들이었다. 이젠 각자가 선장이 되었으니 끝도 없는 인생길, 그 보물섬을 찾아서 표류기를 써 내려가야 하리라.  

 

  오늘 밤 하늘나라에서 양쪽 사돈끼리 만나서 사위 사주를 묻고 대답하며 웃으시지는 않을까?

 

 

                                                  (20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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