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09 17:18
20200130 소식 없이 떠난 첫사랑
박기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랑을 경험 했다고 인지하지 못한 채 내 가슴에 작은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 있었다. 지긋하게 바라보던 조용한 첫 인상에 난 그만 아, 저 사람 참 좋다. 막연히 내 파트너로 지목을 했던 순간, 함께 있던 친구가 큰 소리로 내게 통고 한다. 저쪽에 키 큰 사람 잘생겼다. 나 저 사람 할래.
아는 오빠가 자기 친한 친구를 소개 해 주겠다고 모임을 주선했다. 한 사람 더 있으니 너도 친구 하나 데리고 오라던 여고 졸업 하던 해 어느 봄날이다. 그 당시 군 복무 후 복학생으로 재학 중인 서울공대가 만남의 장소였다.
서울 한 복판에서 자라온 내게 시골 같이 먼 서울공대는 마치 기차라도 타고 여행을 하듯 설렘으로 부풀었던 곳이다. 생전 처음 오빠들 아닌 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 어떤 사람이 기다릴까 하는 기대로 한껏 부풀었던 기억이다.
학교 정문에 세 남자가 서 있다. 소개팅을 마련해 준 아는 오빠와 처음 보는 두 남자. 아직도 50 미터 쯤 떨어진 거리였지만 나도 내 친구도 한 사람에게 꽂힌 거다. 내 속마음 보이지도 못하고 그만 친구가 찍은 그 사람을 관찰하면서 첫 만남의 하루를 지냈던 기억이다. 친구는 이미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기 시작했고 내 의견은 알려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양보하고 두 사람을 이어주려 사심 없이 노력까지 했었다.
<변용 명예 회장님 별세>
어쩌다 생각이 나는 날엔 그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그의 회사 홈피를 방문한다. 어디를 건축 중이고 어느 건물을 건축했고 회사 직원들의 깨알 같은 업무 상황을 접할 수 있으니 그를 만나는 유일한 공간이다.
무슨 소리지? 흔치 않은 외자 이름에 최고 직위랑 그 사람이 확실한데 아니겠지. 나이가 있는데. 왜? 벌써? 언제? 한국 나가서 확인 할까?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잖아. 페이스북에 자세한 소식이 있다기에 닫았던 페이스북을 다시 개설하고 찾아 읽는다.
사진을 보니 확실하다. 그가 건축가 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그의 바쁜 일상으로 우린 소원해졌다. 나도 한국 방문 때마다 동창들과의 꽉 찬 일정에서 겨우 하루 빼내어 약속하고 점심을 함께 했다. 그가 미국 출장을 와서도 단 몇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나이 들며 변하는 얼굴을 서로 익혔기에 지금 내 앞에 보인 그의 장례 사진이 낯설지 않은 거다.
친구에게 맘에 드는 사람 양보하고 쿨 하게 그들의 만남을 주선하느라 그에게 연락하고 시간 약속하고 셋이 함께 만났다. 연락할 때부터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게 말했던 사람이다. 셋 이는 싫고 나하고 둘이 만나겠단다. 그러면 안 된다고 내 입장이 뭐가 되냐고 한 번만 나와 달라고 어르고 달래기를 몇 번 하면서 그와 나는 서로 젖어 들었나보다.
셋이 만났을 때 확실하게 투정부리며 내 친구에게도 간접적으로 자신의 감정 표시를 분명히 했다. 내가 중간에서 뭐라고 거들지 않아도 내 친구는 알아차리고 마음 정리 했다. 친구에게 미안함 때문에 내 마음이 그에게로 활짝 열리지 않았던 시절이다.
서울 공대 기숙사 그의 방을 구경하고, 식당에서 밥도 한 번 먹어보고, 그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보며 그의 꿈을 듣기도 했고, 학교 동산을 둘이 걷던 고운 그림이 내 가슴엔 있다.
대학 졸업식에 오라는 초청의 전화를 거칠게 거절할 땐 재수해서 또 낙방한 내 상황이 그를 멀리하게 했다. 거듭되던 그의 청을 무례하게 막았던 건, 자신 없어 도망친 것이다. 바보였던 나를 그는 알아채지 못한 채 각자의 주어진 길을 걸어온 한참 후 나는 그를 찾아야 했다.
내가 왜 그리 못되게 굴면서까지 그를 밀어 내야 했던가를 죽기 전에 사과하고 싶었다.
“왜 그랬어?” “몰랐어?” “응” “그걸 왜 몰라? 자신 없으니까 그랬지.”
겉으로 보기엔 쾌활하고, 당당하고, 자신 만만해 보이는 여자에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면이 있었냐고 놀래는 표정에 호탕하게 웃어주며 진한 마음으로 미안함을 전했다. 그 당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모든 면에 의기소침 했던 어려운 시기임에도 나를 원했단다.
우리의 마지막이 된 만남은 그의 일터. 커다란 건축 도면을 펼쳐 놓고 앞에 나를 앉힌 채 일에 취해 있던 모습이다. 차를 보내주고, 나를 사무실로 데려 가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남자. 그날 점심은 일식집. 내 식성을 종교를 통해 익히 짐작하고 요것조것 골라서 내게 주던 따뜻함. 그런 멋진 남자가 항상 그렇게 거기 있으려니 믿고, 한 동안 연락 안 했던 세월.
그가 없다. 내가 보고 싶으면 가서 볼 수 있는 거기에 그는 없단다. 내게 한 마디 통보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단다. 그것도 3년 반 전에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단다. 우린 이 정도로 마음이 통하지 않았던 사이였나? 난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런 걸 어찌 사랑이라 일컬을 수 있겠나. 그래도 그는 내게 첫 사랑이다.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2020 미주문학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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