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촬영 중

2020.05.28 14:39

최정순 조회 수:5

아직도 촬영 중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최 정 순

 

 

 

  혀는 짧아도 침은 멀리 뱉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자격증 하나 갖추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은행원이 되고 싶었으니, 꿈만 야무진 셈이었다. 한 가지 내세울 것이 있다면 노래는 남의 축에 빠지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도시 변두리에 있는 자그마한 중학교에 취직을 했다. 교직원 중에 총각선생 둘에다 나를 포함 처녀선생이 셋이나 있었다. 공교롭게도 출퇴근길에 어느 남자고등학교를 지나야 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다. 짓궂은 남학생들은 이층 창틀에 걸터앉아 아직 여고생 티를 벗지 못한 내게 휘파람을 불어댔고, 낯 뜨거운 농담을 퍼붓기도 했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많이 터덕거렸고 동료들과도 퍽 서먹했다. 그러나 차츰차츰 학교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몇 달이 흘렀을까? 전혀 모르는 이성으로부터 짤막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부른 유명한 가수 이름과 같았다. 사연의 발단은 X총각선생이 내 승낙도 없이 나를 자기 친구한테 소개한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웅(♂ ♀)이 모인 곳에는 이성의 다툼이 있기 마련인가보다. 드디어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게 온 편지를 또 다른 총각선생이 가로채고는 넘겨주질 않았다. 이성의 다툼이 시작되었단 말인가? 편지내용을 공개하면 편지를 넘겨주겠다는 단서를 붙이고서야 편지가 내 손에 들어왔다. 화가 난 X총각선생으로부터 자기 밥도 제대로 못 찾아 먹는 바보 같다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성에 대하여 맹추였다. 야릇한 추억 한 토막을 남겨놓고 청포도가 익어갈 무렵 X총각선생은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 1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다.  

 

  볼거리 문화가 각박했던 그 시절, 1년에 몇 번 학교에서 보여주었던 단체 영화관람의 열기는 칠월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다. 극장 앞에서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의 불꽃 튀는 이성의 눈길을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였다. 개미떼처럼 길게 늘어선 줄, 와글거리는 개구리소리, 금속성 같은 휘파람소리, 경찰아저씨들의 지휘봉과 여학교 훈육주임의 호각소리, 영자, 순자, 정자 등 여학생들의 이름을 불러댔던 까만 교복차림의 남학생들의 열기는 들끓는 용광로 같았다. 어디에서 이런 광경을 다시 만나볼 수가 있을까? 마냥 즐거웠던 학창 시절이 몹시 그립다.      

 

 

 

  여름방학을 하는 날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도『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드디어 영화는 시작되었고 영화는 끝이 났다. 이제 우리는 한 달간의 긴 방학에 들게 되었고, 방학이 끝나야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들 돌아간 텅 빈 영화관의 커다란 스크린은 조금 전의 그 화려함과 웅장함과 당당함을 어디에다 감추고, 보잘 것 없는 후줄근한 광목천만이 벽을 가리고 있을까? 맞아, 영화란 눈속임이야! 그런 줄 알면서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참 허망했다. 나만의 느낌일까? 마치 인간의 부귀영화도 한 순간이라는 것을 말해 주듯이 말이다. 그러면서도 스칼렛의 잔영(殘影)에 사로잡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있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내일의 태양은 내일 뜰 거야.’ 를 되새기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는 원작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은 적은 없다. 단지 저자인 마가렛 미첼은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나 애틀랜타 저널기자였으나 소설을 쓰기위해 직업도 버렸다. 불후의 명작『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녀작을 남기고 마흔 아홉 살에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다.  

 

  칠월의 저녁바람은 염기 있는 내 몸을 고슬고슬하게 말려주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청순한 소녀는 아직도 영화 속에 빠져 방향을 잃고 터덕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젊은이는 바로 내 편지를 가로챈 그 총각선생이었다. 연애는 ‘타이밍’ 인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란 로맨틱한 영화를 보고나서 아직 잔영이 남아있는 그 순간과 칠월 열이레 저녁 중천에 뜬 달과 가끔 불어오는 바람은 두 젊은이를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었으리라.  

 

  7월에 만난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또 다른 영화를 나와 촬영하게 될 주인공을 만나게 해준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내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다준 영화! 인생은 한 편의 영화라고 했던가? 나는 내 인생의 영화를 오늘도 착실히 촬영하고 있는 중이다. 흥행에 연연하지 않고 내 인생의 영화는 ‘아직도 촬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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