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인, 쓰마라구

2020.08.08 13:15

윤근택 조회 수:4

신비의 여인,‘쑤마라구[蘇麻剌姑]’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언제부터인가, 나는 채널A’에서 연속 방영하는 천일야에 폭 빠져 지낸다. 그 프로그램은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내용들로 꾸며져 있다. 나는 최근에 바로 그 프로그램을 통해, 어느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재탕으로 보게 되었다.

  그녀는 몽골족이었고, 커얼친[科爾沁] 초원에서 가난한 유목민의 딸로 태어났다. 최초의 이름은 쓔모얼인데, 몽골어로 털로 만든 주둥이가 큰 주머니란 뜻이다. 후일 그녀가 병으로 인해 9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청나라 황실에서는 그녀를 존경하는 의미로 쑤마라구라고 불렀다.

  위 천일야극에서는 쑤마라구가 남편을 살해하는 장면부터 시작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자, 남편의 학대는 더욱 심해졌다. 급기야는 남편이 쑤마라구를 목 졸라 죽이고자 한다. 그러자 쑤마라구는 숨기고 있던 칼로 남편을 찔러 살해하고 만다. 그런 다음 그녀는 물가 높은 바위에 올라 투신자살을 시도하여 물에 첨벙 뛰어내린다. 마침 시녀와 함께 그 강가를 거닐던 효장황태후(孝庄皇太后)’가 물살에 떠 내려온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 효장황태후는 쑤마라구와 마찬가지로 몽골 출신으로, 13세 때부터 미색이 뛰어나 그 소문이 자자했고,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태종)’와 결혼한 여인이다.

  쑤마라구가 되살아나 몽롱한 상태에서 둘러보니, 궁궐 안 효장황태후의 화려한 처소. 효장황태후는 그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몽골 출신임에 끌리어 궁궐에 계속 머물기를 원했다. 쑤마라구는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하였다. 몽골어를 잘 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어와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특히 만주어는 글씨가 예뻐,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할 정도였다. 그녀는 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효장황태후의 손자이자 후일 청나라 4대 황제가 될 강희제(康熙帝)’의 만주어 교사가 되기도 하였다. 쑤마라구는 재단과 재봉에도 뛰어났다. 그녀가 만든 옷은 몸에 딱 맞기도 하려니와 맵시도 뛰어나, 청나라 관복(官服)의 모양을 제정하는 데도 참여하게 된다. 그녀의 빼어난 재단 솜씨는 에피소드를 낳기도 하였다. 한번은 야심한 밤에 효장황태후의 아들이자 황제가 된 순치제(順治帝)의 처소에서, 효장황태후와 순치제가 애지중지하는 후궁 동악비(棟鄂妃)’한테 발각되고 만다. 그녀는 순치제의 허리를 쓸어안고 있는 장면이 발각된 것이다. 동악비는 눈이 훽 돌아가고, 효장황태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내뱉는다.

  “내가 너를 어여삐 여겨 궁에 머물게 하였거늘... .”

  황제가 대변하게 된다.

  “어마마마, 쑤마라구는 내가 입을 옷을 재단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토록 그녀는 재단과 옷감 선택에 탁월했던 셈이다. 몰골 초원에서 자라난 덕분으로 말[]도 잘 탔다. 해서, 효장황후를 위하여 궁궐 바깥을 다니며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쑤마라구와 황후는 분명 주종관계였으나, 두 사람이 같이 있을 적에는 자매 같았다고 한다. 효장황태후는 그녀를 부를 적에거거[格格]!’라고 했다는데, 황실에서만 쓰는 말로서 아씨!’에 해당한다고 한다. 청나라 3대 황제 순치제는 쑤마라구를 같은 또래로 대하였고, 강희제는 만주어 교사이기도 하였던 그녀를 어냥[額娘]!’ 어머니!’로 호칭했다. 그리고 강희제의 자손들은 모두 그녀를 할머니로 대했다. 그러함에도 쑤마라구는 늘 조심하고 공손하게 사람을 대했으므로 모두 그녀를 존경하였다.

  강희 26(1687)에 효장황태후가 74세의 나이로 죽자, 쑤마라구는 이미 70세 노파였으며 깊은 슬픔에 잠겨 지낸다. 그러자 강희제는 평소어냥[額娘]!’ 어머니!’로 불렀던 그녀를 위해, 자기 아들 35명 가운데에서 황십이자(皇十二子) 윤도(胤示+)’의 유모가 되어 달라고 한다. ‘윤도는 겨우 3살배기였다. 품위있는 유모 쑤마라구는, 윤도를 잘 훈육하여 그 많은 이복형제들이 황위쟁탈전 등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는 등 비극을 면하게 한다. 쑤마라구는 평생 재혼치 않고 계속 황궁에서 생활하게 된다. 효장황태후가 죽은 후에도 18년을 더 황궁에서 지낸다. 윤도가 다 성장한 후 그녀는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쑤마라구는 기이한 습관이 있었다고 알려진다.그 하나는, 일 년 동안 절대로 목욕하지 않았다는 거. , 일 년 가운데에서 하루를 날 잡아 약간의 물로 몸을 씻되, 그 씻은 더러운 물을 다 마셨다고 한다. 또 하나는, 아무리 병세가 심해도 절대 약을 먹지 않았다는 거. 그녀의 괴이한 습관은 황제까지 알고 지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는 매우 건강했고 93세까지 건강상 아무런 문제없이 살았다.

  강희 44(1705), 그녀는 병세가 악화되어 병상에 눕는다. 당시 강희제는 변경 순시중이었고 자금성에 없었다. ‘윤도를 비롯한 강희제의 그 많은 아들들은 그녀한테 치료받기를 권했으나, 그녀는 거절하였다. 마음이 급한 황자들은 그녀를 번갈아 업고 어의(御醫)한테 달려갔으나, 어의는 이미 그녀를 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1705 9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후 청나라 황실이 그녀에게 이런 저런 특별대우를 했다고 한다. 왕희제의 그 많은 황자들이 일제히 장례식에 참례하였다. 특히,‘윤도는 황제에게 졸랐다.

  “아바마마, 어릴적부터 저를 길러주셨는데, 저는 아직 보답을 해드리지 못하였으니, 일 백 일 동안 밥을 올리고 3일 동안 또는 7일 동안 독경(讀經)토록 윤허해주십시오.”

  이에 왕희제는 황실에 전례(前例)가 없었으나, 이를 윤허해주었다.

  청나라 황실은 무려 6개월 여 걸려, 쑤마라구의 묘소를 지었다고 한다. 한낱 시녀(侍女)에 불과했던 그녀이기에, 황실 법도상(法道上) 평소 자매처럼 지냈던 효장황태후와 같은 곳에 묻을 수는 없어, 효장황태후의 묘소에서 1.5km 정도 떨어진 명당에다 묘지를 마련하였다.

  시녀에서 출발하여 강희제의 사부(師父)가 되고, 강희제 자손들의 유모가 되고... . 과연 그녀는 청 황실 신비의 여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문득, 슈마라구의 생애를 생각하자니, 견주어지는 이들이 떠오를 게 뭐람? 자기 분수를 모르고, 운 좋게 완장(腕章) 하나 얻어 차면, 길길이 날뛰던 이들이 역사상 얼마나 많았던가 하고서., 지금도 둘레에 그러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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