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여느 여름날의 일기

2020.08.09 14:18

김효순 조회 수:3

어느 비 오는 여름날의 일기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김효순

 

 

 

 올 여름에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무더위가 찾아올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내심 걱정스런 마음으로 7월을 맞았는데, 햇볕이 쨍한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이었고 비 내리는 날이 많았던 한 달이었다. 덥기는커녕 밤에는 가끔씩 한기가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이제 8, 입추가 지났는데 어제도 오늘도 비가 내렸다.

 직장에 다니는 작은딸네 아이에게 어린이집 등·하원 도우미 노릇을 해주던 큰딸이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래서 제 이모를 대신하여 내가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어야 했다. 제 어미가 출근을 하고 한참 지난 뒤에야 눈을 부비면서 거실로 나온 손녀는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다.

 서둘러 어린이집으로 갈 필요가 없음을 아는 녀석은 느긋하다. TV 어린이 방송을 꼼꼼히 챙겨보고도 집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린 것에게 할머니는 만만한 상대다. 가다가 편의점에 들러서 오렌지 주스랑 막대 사탕을 사주기로 약속하고. 양치질은 생략하고 얼굴과 손은 물수건으로만 닦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그 다음은 옷 갈아입을 차례인데 또 문제가 생겼다. 제 어미가 챙겨두고 간 옷이 맘에 안 든다며 고개를 젓더니 옷장 안에서 제가 입고 싶은 옷을 꺼내온다. 소매가 길고 도톰한, 빛깔 고운 봄옷이다. 그 옷을 입고 가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줬더니 선선히 수긍을 한다. 제 어미가 골라둔 얇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히려다가, 여름이라고는 하나 비가 내리고 실내에서는 종일 에어컨을 켜둘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잠자리에서 일어난 손녀는 소매가 달려있는 윗옷에 얄포름한 7부 바지 차림이었다. 내 눈에는 그 옷차림이 오히려 마땅하게 보여서 그대로 입힌 채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분주했던 아침을 보내고 따끈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스마트 폰을 열었다. 여느 날처럼 부지런한 벗들이 보낸 카톡 메시지들을 대략 훑어보고 여기저기 서핑을 시작했다. 붉은 빛깔의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여인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목선이 깊이 파이고 하얀 다리가 시원스럽게 드러나는 스커트 한 자락이 바람에라도 날린 듯 살짝 접힌 모습이었다. 숏 커트한 머리와 동그스름한 얼굴과 복장이 잘 어울려 보였다. 기사를 클릭했다. 그는 정의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었다. 그녀는 국회에 일하러 나가는 모습이라고 했다. 그런 그녀의 복장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아주 분분했다.
 나는 딸만 둘을 두었고 아주 가까이 지내는 내 친구는 아들만 키워본 사람이다. 짧은 치마를 입거나 배꼽이 드러나는 셔츠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를 보면, 내 친구는 눈을 흘기곤 했는데 내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발랄하고 오히려 생기가 넘쳐 보였었다.
 그런데, 젊은 국회의원의 그런 복장을 보면서는 자꾸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참 후에 나는 그녀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서 시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국회는 나의 일터다.’라고 했다.

 목선이 깊게 파이고 앞자락이 날리는 짧은 치마가 일을 할 때 입기에 적절한 옷이었을까? 더군다나 대부분의 동료들이 나이가 많은 남성들로 이루어진 일터에서 그런 옷차림은 그녀는 물론 동료들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복장은 아니었을까?


 퇴근한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 딸의 오늘 복장에 대해서 내가 하는 설명을 다 듣고는
 "엄마, 그래도 그렇지. 잠 잘 때 입히는 옷을 입혀 어린이집에 보내면 어떡해?"

 할머니인 내 눈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온종일 쏟아지던 비가 밤이 이슥해서야 멎었다. 빗속에서는 숨을 죽이고 있던 매미들이 울어댄다. 가을이 코앞이라 갈 길이 바쁜 매미들은 밤을 새울 모양이다. 앞 빌딩의 지하로 빗물이 스며들었다더니 물을 퍼내는 펌프의 모터도 툴툴거리며 애를 쓰고 있다.                                                                     (2020. 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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