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뒷모습

2020.09.03 17:23

양희선 조회 수:5

아들의 뒷모습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양희선

 

 

 

  잿빛으로 물든 우중충한 파도가 밀려들고, 싸늘한 바닷바람은 품속을 파고든다. 줄줄이 늘어선 하얀 천막들은 어설프게 펄럭인다. 가게 앞에 진을 친 어항 속 활어들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전어, 꽃게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물밀듯이 몰려든 식도락가들은 떠들썩한 확성기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온통 먹거리에만 쏠리는 것 같았다.

 

 독일에서 사는 둘째아들이 사업차 한국에 왔다. 오늘은 103일 개천절이다. 우리나라건국일이자, 막내인 둘째아들 생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생일날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하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나보다. 아들은 생일을 자축하는 의미로 모처럼 전어회도 먹고, 바닷바람도 쐴 겸 서해로 가자고 했다.

 

 “전주에서도 먹을 수 있는데 멀리까지 시간낭비할 게 뭐냐?

 남편이 아들을 나무랐다. 돈을 낭비하지 말라는 훈계 같았다.  

 “아버님의 말씀도 옳은 말씀이지만, 모처럼 부모님 모시고 바닷바람에 머리도 식힐 겸, 오붓한 한때의 추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가슴이 짠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산천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바쁜 짬을 내어 바다구경 가자고 했을까? 얼큰한 매운탕과 싱싱한 회를 좋아하는 아들이 생선구경 하기 힘든 독일에 살면서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미안했던지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돈을 쓰기위해 벌고, 돈은 써야 또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돈이란 벌기도 힘들지만,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아들은 서울의 명문 Y대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기업체에서 우수한 제품을 생산한다 해도 팔리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때문에, 각 회사에서는 유능한 인재를 차출하여 해외 마케팅에 중점重點을 둔다. 입사한 지 몇 년 뒤 1998년 구제금융체제(IMF)에 들어갔다. 각 회사에선 합병(M&A) 바람이 불었다. 아들은 독일지사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회사원은 사칙에 따라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는 게 규칙이다. 독일, 터키, 러시아, 이태리 등 유럽일대를 넘나들며 정보를 교환하고, 각국 회사에 필요로 하는 공작기계를 용도에 따라 마케팅 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아들은 20여 년 동안 회사에서 일했던 그 열정을 내 사업으로 끌어들여 최선을 다하리라 결심하고 창업하겠다고 나섰다. 설립자금 때문에 고심했을 것이나 부모형제들에게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남편이 돈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목돈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 아니니 염려마시라고 한다.  20여 년이나 종사한 공작기계 마케팅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국경을 넘나들더니 배포가 커져 태평양 같았다. 말수가 적어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성격이다. 허나, 각국 바이어buyer들을 상대로 입을 열면 논리적인 구사력을 거침없이 발휘하는 달변가로 듣는 이로 하여금 설득력에 빠져들게 한다. 마케팅marketing은 수완手腕도 있어야겠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해쳐나가기 힘든 직업이다.

 

 무역을 하는 아들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쳤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국제간의 교류가 형성되어야 오가며 장사를 할 수가 있다. 바닷길, 하늘 길이 코로나로 막혀 꼼짝 못하니 큰일이다. 서류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제품이라도 본체를 봐야 사고팔 게 아닌가? 높은 가격의 기계를 가동도 해보지 않고 매수買收할 순 없지 않겠는가? 수요자의 요청에 따라 약간의 구조변경도 고려해야 될 거고. 하늘 길 뱃길이 열리고, 기업가CEO에게는 코로나격리14, 금쪽같은 시간을 면제하는 특혜가 있어야 일을 할 게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접니다. 저 한국에 왔어요.

 “어떻게 왔어?

 “면제받고 왔어요. 창원공장과 부산을 거쳐 집에는 토요일에 들러 부모님 얼굴만 잠깐 뵙고 다시 갈 겁니다.

 아들의 전화를 끊고, 어안이 벙벙해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일을 하러 왔다니 다행이다. 헌데, 부모 얼굴만 보고 그냥 간다는 건 웬 말인가? 음성 결과로 자유롭게 다니고 있는데 고지식한 아들은 노약한 부모에게 코로나감염이 염려되어 스스로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마음이 아팠다. 코로나는 부모자식간의 인정마저 갈라놓는 악마였던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코로나가 아니라 뜨거운 불속이라도 뛰어드는 게 부모마음이다.

 

  50대 중반인 아들 머리에 희끗희끗 서리가 내렸다. 머리를 많이 쓰면 머리카락이 빨리 희어진단다. 두 어깨에 5명의 식구가 매달려 있다. 한 달만 공쳐도 노심초사다. 남의 돈 먹기가 그리 녹녹하던가?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속담처럼 낯선 타국에서 그 누구에게 의지 할 곳이나 있었겠는가? 오로지 자신감을 갖고 사는 수밖에. 지금이 한고비다. 작은아들의 큰딸이 베를린의과대학 졸업반으로 인턴중이고, 둘째아들이 독일명문 아헨공과대학 석박사과정 중이며, 막내딸이 함부르크치과대학 4학년이다. 아이들은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며 자립정신을 기르고 있다. 자식을 위한 괴로운 고통과 희생을 참아내는 게 부모이지 않던가? 자녀들의 하숙비,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흰 머리카락이 하나씩 더 늘어나지 않았을까?

 

  이틀 밤을 집에서 묵고 독일로 떠났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축 처진 어깨가 오늘따라 왜 그리 안쓰러운지 모르겠다. 독일에서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린지 2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굴곡진 삶, 덧없는 세월을 용케도 버텨왔으니 무던하다.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몇 년 만 더 고생하면 한시름 놓으려니 싶다. 밥벌이가 무엇이며, 사는 게 무엇이길래 두려운 코로나의 공포 속에 겁도 없이 뛰어들어 모험을 했단 말인가? 아버지란 버거운 짐을 메고, 쓸쓸히 돌아서는 아들의 뒷모습이 왜 그리 애처로운지 모르겠다.

                                                  (2020. 9. 4.)

 

※ 바이어buyer : 물품을 사기위해서 외국에서 온 상인. 수입상

※ 마케팅marketing : 제품을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합리적으로 이전하기 위한 계획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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