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서정

2020.11.12 13:06

김재희 조회 수:22

[금요수필]늦가을의 서정 / 김재희

기사 작성:  이종근
- 2020년 11월 12일 14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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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던 단풍잎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나면 휑한 바람만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서 곤두박질친다. 그러나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바라보는 맛을 놓칠 수 없는 때다. 떠나기 위해 마지막 마무리하는 가을 뒷모습을 바라보고 싶어 모악산을 찾았다.

적당히 조용하고 한적한 산길이었다. 계곡 물소리도 여느 때보다 여유롭게 다가왔다. 중간중간 작은 웅덩이에 차곡차곡 가라앉은 낙엽들. 물에 녹아 있을 것 같은 곱디고운 빛깔이 전이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에 가만히 손을 넣어 보았다.

손끝에 물이 닿자마자 온몸이 흠칫 움츠러든다. 손끝에서만 느낄 줄 알았던 차가움이 한순간 거의 온몸으로 퍼졌다. 그 빠른 흐름에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빼 버리곤 멍하니 물만 내려다보았다. 별 의식 없이 행했던 행동에 의외로 매우 놀라버린 내 몸의 반응이 왠지 호들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서서히 시도해 보았더니 차가움의 정도가 처음 같지는 않았다. 조금 익숙해진 써늘함이기에 잠깐은 견딜 수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시린 쾌적함을 즐기며…….

같은 온도에 놀람과 즐김으로 엇갈리는 건 준비된 상태와 아닌 것의 차이겠지. 어떤 일에 관한 결과가 서로 다르게 느껴지는 건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고. 한 번쯤 겪어봄으로써 생의 어느 한 부분에 깊이를 더해 준다면, 설령 그런 일이 없어도 되는 일일지언정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 살아가는데 이런 시행착오가 조금은 필요한 게 아닐까.

힘겨운 숨을 한꺼번에 쏟아내면서 정상에 발을 디뎠다. 날이 무척 맑아서 전주 시내가 아주 선명하게 내려다보였다. 그곳에 서 있으니 그리 복잡하고 답답한 도시도 별것이 아니구나 싶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솟아났다고 해도 될까. 이런 날은 온 산을 헤매도 좋으리라 싶어 다시 금산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려가는 구간마다 풋풋한 신우대가 늘어선 우아한 길이기도 하고, 노란 소나무 잎이 찹찹히 쌓인 울창한 소나무 밭이기도 하며, 발목을 덮을 만큼 수북한 떡갈나무 낙엽 길이기도 했다. 모든 걸 다 털어 버린 산이라서 허허로울 것 같던 가을의 끝자락 길이 그렇게 오붓할 줄이야. 스산하던 바람은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방울을 보고 살짝 꼬리를 내리면서 빠져나가고 발에 밟혀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허공에 여울졌다가 다시 긴 여운으로 되돌아왔다.

푹신한 낙엽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낙엽 냄새가 코뿐만이 아니라 살갗으로도 스며드는 것 같았다. 온 피부를 다 열어 흠뻑 들여 마시면서 이미 수분이 빠져버린 퍼석한 낙엽 한 장을 주워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낙엽들은 다 같은 낙엽이 아니었다. 어느 것은 온전하지만 어느 것은 벌레가 흔적을 남겼다. 예측하지 못했던 고난들 앞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친 상처 같은 것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런 흔적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저 평범한 무늬에서 좀 더 색다른 형상으로 탈바꿈한 그것들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것들은 벌레에게 먹히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또 다른 세상맛을 보았을 것이고 그 다른 세상이 잎의 생을 폭넓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기까지의 그들 고통이 어찌 가볍다 하랴. 그렇듯 크고 작은 고통을 동반하면서도 꿋꿋하던 잎들이 끝내 생을 마감해 버린 자리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바람과 햇살을 들이쉬고 뱉어가면서 채운 결실을 눈잎, 꽃잎으로 품어내고 스러진 그들의 몸짓은 결코 아픔만은 아닐 것이다. 다 비워버린 허무함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뿌듯함의 온기로 뿌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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