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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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산 우리집의 전 주인은 이 집에서만 45년을 살았다고 한다. 집을 지어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자식 낳고 기르고 출가시키고, 나이 들어 자식들 곁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내놓았다고 한다.

전 주인은 집 안보다 바깥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장미, 동백, 무궁화, 아이리스 등 꽃나무를 비롯해 오렌지, 레몬, 복숭아, 포도 같은 과실나무를 앞뒤 마당에 다글다글 많이도 심어 놓았다. 특히 포도나무는 가지가 편안하게 뻗어나가도록 가는 나무막대를 얼기설기 엮어놓아 주렁주렁 달린 포도 송이가 담을 덮고 있다.

영글어가는 연둣빛 포도 송이에 눈길이 닿으면 시큼한 침이 금세 입안 가득 번지고, 하얀 분 뽀송뽀송한 짙은 보라로 물들면 한 송이 톡, 따내는 상상만으로도 손끝이 짜릿짜릿하다.

포도를 따며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떠올린다. 청포도라면 연두색을 말하나? 이 구절이 생각날 때마다 솟아나는 의구심이다. 초록 잔디를 파란 잔디라고 하고, 녹색 신호등을 푸른 신호등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한 자료가 눈에 번쩍 들어온다. 이 시 속의 청포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포도인 연두색 포도가 아니라 바로 검푸른 바다와 같은 바로 그 청색이라는 의견이 설득력 있게 설명되어 있다.

그 아래 댓글들도 흥미롭다. 7월이면 검은 포도가 별로 없을 터이니 이 육사의 청포도는 '익어가는 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혹은 음력 7월을 말하는 게 아니냐, 양력으로 8월이면 튼실한 검붉은 색의 포도가 가능하니까라는 글부터 시의 극명한 대비 효과를 얻기 위해 '청'이라는 말을 넣었을 것이다, 그것이 시인에게 주어지는 시적 사용권이 아니냐? 등등 의견들이 분분하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후반 구절을 읊으며 다시 시 속의 포도 색깔을 가늠해본다. 돌아가신 시인을 깨우기 전에는 알 수 없겠지만 '내 그를 맞아' 먹으면 더욱 달콤한, 손가락과 입 주위가 금방 퍼레지는 우리 집 포도와 같은 검붉은 색깔이 분명한 것 같다.

아무튼, 내 집 마당의 과실을 딸 때의 뿌듯함이라니…. 사 먹는 것과는 사뭇 기분이 다르다. 그런데 그 쏠쏠한 즐거움은 이사 온 다음 해로 끝이 났다.

올해도 알맹이가 쏙 빠져나가 너덜너덜해진 까만 껍질, 입질하다만 알갱이를 안쓰럽게 감싸 안은 뭉그러진 보라 껍질, 열등아처럼 끼어있는 청포도까지, 포도즙으로 엉겨 엉망이 된 포도 송이와 '나 잡아 봐라~'는 듯 담벼락 위를 재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다람쥐를 대책 없이 바라볼 뿐이다. 포도알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포도나무를 휘젓고 다니는 다람쥐, 얄밉긴 하지만 폴짝대며 돌아다니는 그들로 인해 뒷마당이 생기로 가득 차는 것 같아 포도는 마켓가서 사 먹기로 했다.

그리고 9월은 왔다.

미주 중앙일보 2013.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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