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봄을 기다리며

posted Jan 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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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라는 단어만큼 가슴 설레게 하는 말도 드문 것 같습니다. 가슴 두근거리면서 맞곤 했던 새해였는데 위축된 경제 분위기 탓인지 올해는 새해의 환한 빛이 많이 바랜 듯 느껴집니다. 새해라는 말이 품고 있는 신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내 인생에 처음 맞는 오늘’ 이라고 매일의 해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새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은 지 오래된 집이지만 사람들은 “새집으로 이사하니까 좋죠?” 라는 인사말을 던지곤 합니다. 새로운 관계성을 갖게 되는 것들은 그것의 탄생의 날과 관계없이 언제나 새것이 될 수 있나 봅니다. 새해, 새집, 새사람…정말 ‘새’로 시작하는 이런 말들은 '희망' 이라는 단어와 통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희망이라는 단어와 종종 동의어로도 사용되는 봄을 사람들은 그렇게 기다리나 봅니다. 봄이 온다 하여 달라질 무엇도 없는 사람들 조차 '봄이 오면 좋아질 거야' 막연한 희망을 가져 보곤 합니다. 2008년12월 31일까지만 해도 ‘겨울이 깊었구나’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2009년 1월 1일 이후부터는 ‘봄이 오겠구나’ 마음이 완연히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봄’ 을 가슴에 품은 순간부터 우리의 눈길이 닿은 모든 곳에서 봄이 묻어나기 시작합니다. 봄은 ‘신비’의 계절입니다. 우리 속에서 움트는 생각들 대부분은 푸른빛을 띕니다. 초록들판으로 달려 나가고 싶던 어린시절의 봄기운을 기억해 내기만 하면 그렇게 힘들던 일들이 견딜만한 일로 바뀌고 말 것 같습니다.

여덟 명이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성가대 친구들인데 한나절이 짧다는 둣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중에는 한달 전쯤 유방암 수술을 한 분이 있습니다. 유방암 수술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자궁에 큰 혹이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검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혼자 있을 때면 많이 불안하다고 합니다.

남편이 루게릭병으로 누워있어 병구완 일에 온통 매달려있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임에라도 나오는 날은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유방암 덕분에 자궁암일지도 모르는 혹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말씀을 들으며, 음식을 잘 먹어 남편 얼굴에 살이 올랐다는 안도의 표정을 바라보며 ‘봄’이라는 단어를 떠 올립니다. 봄은 겨울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 속에서 이미 호흡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선을 다하되 더 악한 상황이 아닌 것에 감사하는 것, 봄을 맞을 준비가 된 사람들의 마음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두가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따뜻한 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요즘 마켓 가기 전에 쿠폰을 뒤적여 봅니다. '그거 얼마나 된다고…' 하면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광고지를 유심히 살핍니다. 모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할인쿠폰 있는 레스토랑’을 찾자 보자!’ 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흐름 속에서도 저는 희망을 봅니다.

새해, 새집, 새사람처럼 ‘새로운 흐름’도 봄이 멀지 않다는 신호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 공포감마저 감도는 미국경제 상황이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봄은 올 것입니다. 겨울 속에서 부지런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봄처럼 우리의 할 일을 찾아보아야 겠습니다. 사소한 것부터 하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서 “놀랬지?” 하면서 봄이 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를 여물게 한 겨울의 고마움을 잊지 않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