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2.05.04 05:17

좋은 이웃 찾기, 내 이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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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러 민족이 고루 섞여 있지만 7년 전 우리가 처음 지금의 사무실 빌딩에 입주할 때는 일본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같은 층에는 일본인 변호사 부부가 입주해 있었다.

그 노부부는 사무실 근처에 왔다가 잠시 들른 나의 아들과 우연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대학 운동팀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자기 손자뻘쯤 되는 내 아들과 선후배지간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얼굴 마주칠 때마다 아들 안부 겸 서로의 안녕을 나누는 각별한 이웃이 되었다.

나의 바로 앞 사무실에는 중년의 일본인 공인회계사가 입주해 있었다. 그의 아내는 회계사인 남편을 도와 함께 일하고 있는데 회계사인 남편이 꽃 앨러지가 있어 손님들이 선물로 주고 가는 꽃은 모두 우리 사무실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영문도 모르고 황송해 했는데 사연을 알고 난 후 세상에 이런 복도 있네 하며 홀가분한 기분으로 꽃을 받는다. 사무실을 잠시 비울 때면 서로의 우편물을 받아주기도 하며 지금까지 돈독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좋은 이웃만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아주 꼴 보기 싫은 인간도 있다. 우리가 입주하던 첫날부터 떨떠름한 태도로 우리를 바라보던 멀쩡하게 생긴 그 일본 남자 오가며 거의 매일 마주치면서도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딴곳에 눈길을 두며 지나갔다. 고개를 갸웃했지만 에이 잘못 봤겠지 애써 무시했고 다른 이웃들에게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분 나쁜 직감이 현실로 나타났다. 우리 사무실 여직원의 차가 자기 차가 빠져나가기 어렵게 주차를 해 놓았다며 불쾌함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위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주차된 차들을 쭉 살펴보고 난 후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생트집 같았다. 혹 잘못했다 하더라도 미국인인 우리 직원에게 말하면 될 것을 왜 우리에게 그러는 거지? 한국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라도 있나?

며칠 후 출근길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더니 같은 불평을 또 하는 게 아닌가. 딱 걸렸다 싶어 너 할 말 있으면 우리 직원에게 직접 해라. 또 정 불편하면 네가 자리를 옮겨라 정색하고 대들었다.

저 인간만 없으면 즐겁겠다 싶었는데 정말 어느 날 이사를 가버렸다. 어휴 속 시원해 했는데 바로 얼마후 노부부 변호사 중 비척비척 걸음이 흔들리던 남편 변호사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길로 부인 변호사는 사무실 문을 닫아버려 우리를 우울하게 했다. 이래서 떠나고 저래서 떠나고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들인데 왜 나쁜 감정을 쌓고 사나 싶지만 어쩌랴.

보안과 교통을 고려하면 비즈니스 사무실로 크게 하자가 없을 거라며 적극 권장해서 입주하게 된 한 지인이 있다. 한 빌딩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얼마 후 또 하나의 한국 업체가 입주했다. 가끔 한국말이 창을 타고 들어온다. 직원들의 휴식시간인가 보다. 한국사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온 빌딩이 한국웃음으로 가득차는 것 같다.

종일 꼬부랑 글자만 대하는 일터에서의 내 미국이름 '제니리'가 원래의 나인 '오연희'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미주중앙일보 "삶의 향기" 4/18/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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