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2.07.12 07:51

고흐의 '밀밭'을 벽에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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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장 깊숙이 넣어 두었던 누런색 액자를 꺼냈다. 20여 년 전 한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그 액자 속에는 고흐의 빛이 여태껏 출렁출렁 살아있었다.

액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벽에 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선물 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 버리지도 못하고 밉살스러운 이삿짐이 되어 돌아다닌 지 참 오래도 됐다.

액자 속에는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이라는 그림의 제목과 '빈센트 반 고흐 더치'라는 그의 풀네임과 그의 짧은 생을 일러주는 연도와 그림의 재료와 크기 소장되었던 박물관에 구입처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

최근 스마트폰을 통해 받은 한 영상 속에는 내 집 장 속에 잠자고 있던 그 그림이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었다. 고흐를 지독히 좋아하는 한 미술가에 의하여 편집된 그 영상에는 고흐의 영혼이 담긴 색의 세계와 고흐의 영혼을 어루만진 돈 매클린의 노래가 애절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공을 넘어 우주에 띄워 보낸 고흐의 영혼이 사람들의 마음에 후벼들어 눈물을 흘리게 하고 입가에 웃음 번지게 하고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었다.

40여 년 전 고흐의 삶과 예술세계를 추모해 발표한 돈 매클린의 음악이 새삼스레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영상시대에 어울리게 잘 편집된 고흐의 작품들과 돈 매클린의 호소력 짙은 음성 거기에 깔끔하게 번역된 노랫말이 더해진 탓일 것 같다.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무려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던 열정의 나날과 희망을 버린 채 죽음을 택한 비극의 순간이 사람들 가슴을 파고든다.

'별이 빛나는 밤/ 팔레트를 블루와 회색으로 칠해요/ 여름날의 밖을 내다봐요/ 내 영혼의 어둠을 이해하는 눈으로/ 언덕 위의 그림자들/ 나무와 수선화를 스케치해요/ 미풍과 겨울의 한기를 그려봐요/ 눈처럼 새하얀 린넨천 바닥에/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이 내게 하려 했던 말/ 맑은 영혼을 가지려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는지/ 맑은 영혼들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하략)

'맑은 영혼이 살기에는 고통스러운 세상'이라는 추모의 노랫말을 떠올리며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되 돌려 보았다. 별.하늘.눈.들판.꽃.나무.감자… 그의 그림 속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을 소중하게 품은 그의 숨결이 들린다.

그림 속의 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고통에 지친 주름진 얼굴들과 웃음 잃은 초라한 사람들을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정신장애로 인해 고단했던 그의 짧은 생애와 자신의 귀를 자르고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갔던 광적인 성품을 떠올리면 안타깝고 가슴이 아려온다.

작가 사후에 빛나는 예술 작품을 대할 때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20여 년 만에서야 빛의 세계로 나온 고흐의 '밀밭'을 벽에 걸었다. 싸구려 티가 줄줄 나는 것 같던 누런 액자가 황금색으로 보이고 황금빛 밀밭과 어쩜 이리 잘 어울리는지 작품의 가치를 알려준 영상이 내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미주중앙일보 '삶의 향기'  2012. 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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