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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만에 다시 찾은 멕시코 티후아나. 국경을 건너자마자 도로가 울퉁불퉁한 것이 매끈한 미국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친정 오빠의 생존이 달린 특수 암치료 병원을 찾아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겁도 없이 넘나들던 국경선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누렇게 메마른 민둥산도 짓다가 만 흉가 같은 건물도 헷갈리는 도로 시스템도 그대로다.

멕시코 국경선 근처에 조성된 공업단지에는 각국 기업체들이 상주해 있는데 한때 잘 나가던 몇몇 업체의 건물이 비어있거나 이름이 바뀌어 있다. 살아남기 위한 구조조정의 산물이라고 한다. 다행히 어쩌다가 보이는 신생업체의 간판이 '희망은 있다'고 소리치는 것 같다.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에 인접하는 멕시코 국도를 따라 거래업체 방문 겸 여행 겸해서 몇 개의 도시를 들렀다. 멕시코는 처음 가보는 지역도 또 사람도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우리네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종족임을 실감케 한다. 누추하고 후미진 곳도 많지만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한국의 60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풍경들이 정겹기까지 하다.

하지만 요즘 멕시코 치안이 좋지 않아 살벌한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터라 건장한 청년들이 떼를 지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차림새와 행동거지를 주시하게 된다. 생활 환경이 윤택하지 않은 거야 어쩔 수 없을지 모르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도로 공사하는 곳이 많아 둘러 다니긴 했지만 타고 간 밴은 이틀 동안 신나게 달려 주었다.

그런데 방문 약속을 맺고 찾아간 한 업체의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다. 리셉션니스트에게 만날 사람의 이름을 알린 후 차를 방문자 주차장소에 옮기려고 다시 시동을 켰는데 전혀 시동이 먹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언제 달린 적이 있었느냐는 듯 꿈쩍하지를 않았다. 생생한 차가 어떻게 갑자기 이럴 수가 있는지 완전히 배신당한 기분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오빠도 그랬다. 그렇게 건강하던 오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꿈만 같고 또 눈물이 난다. 좀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의사를 잘 만났더라면 음식 조절을 더 잘했더라면 살아났을까? 지금도 가끔 그 생각에 골몰할 때가 있다.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발이 묶여 버리긴 했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니 기다려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고맙게도 우리의 상황을 알게된 회사 측에서 그 회사의 기술자 두 명을 보내 주었다. 배터리 뚜껑 연결 단자에 먼지가 껴서 그렇다고 한다. 먼지 때문에 차가 안 움직이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의 의구심에 아랑곳없이 그들은 도구를 챙겨와 정성껏 단자에 붙어있는 녹처럼 보이는 먼지를 벗겨 냈다. 그리고 차는 거짓말처럼 시동이 걸렸다.

차를 타고 나오는데 거리에 보이는 멕시칸들이 모두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다정해 보였다. 겸손한 표정으로 자리를 뜨던 그들의 따스함에 대해서, 조물주가 훅 불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는 먼지 같은 인생에 대해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은 채 국경을 건너왔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2013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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