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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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듬어진 초록 공원 언덕 위에는 오빠가 육신의 거처를 옮기던 그 날처럼 아침 햇살에 금빛 억새풀이 물결치고 있다. 비석 곁에 박혀있는 화병을 꺼내 준비해 온 국화꽃을 꽂아놓고 '가을이야… 한국 다녀 오려고… 엄마한테 안부 전할게….' 또다시 회한에 젖는다.

성묘를 끝내고 나오는데 공원 직원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비석 곁에 꽂혀있는 꽃들을 수거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꽃은 치우지 말라고 일러준 후 옛동산에라도 오른 듯 공원을 둘러본다. 산 자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모두 거둬 간 저쪽에, 같은 종류의 꽃들이 세 개의 화병에 나란히 꽂혀있다. 가까이 가 보았다. 한 개의 비석에 꽃병이 세 개다. 꽃을 치우지 말아 달라는 메모지를 가운데 꽃병에 살짝 매어 놓았다. 꽃의 신선도로 봐서 어제 다녀간 것 같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망자의 이름이 나오고 그 아래 이 땅에 머물다간 세월을 알려주는 숫자에 머문 순간, 내 머릿속으로 신선한 기운이 흘러드는 것 같다. 바로 어제가 돌아가신 분의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날로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은 망자의 생일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비석 위의 이름이 반짝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살아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죽고 나서 평가받는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안개 같은 두려움이 몰려온다. 자신이 떠난 후를 자신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몇 해 전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두 분이 생각난다. 한 분은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지병으로 떠나신 분은 발병하기 전 오랜 세월 동안 주위 분들에게 많은 덕을 끼치며 살아오셨던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떠남을 애통해하며 그의 인품을 칭찬했다. 그는 이 땅에서 퇴장했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아름답게 등장했다.

다른 한 분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먼발치에서 우연히 보게 된 어느 모임에서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돌출된 행동에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속사정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모임의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그러나 곧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런데 이 땅을 떠난 사람 이런 말 하긴 싫지만… 하면서 그의 살아생전 친분을 가진 적이 있는 사람들이 그의 별난 행동에 질겁을 했다는 나름대로 경험을 스스럼없이 쏟아놓았다. 평소 좋은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떠난 사람을 내놓고 비난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퇴장은 하늘에 달렸지만 등장은 우리의 몫임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아는 한 시인은 사람이 잠든 미국공원을 '처연한 슬픔이 꽃처럼 놓인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그곳에 가면 사람도 아프고 꽃도 아프다. 그런데 오늘, 떠난 자의 생일을 기념한 누군가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려 보다가 '오빠의 삶은 우리 가족의 축복이었어…' 라고 되뇌어 본다. 오빠와 함께했던 내 추억의 창고에 햇살이 가득찬다.

미주 중앙일보 201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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