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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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YMCA 문을 밀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 유리 벽 안으로 수영장이 보인다. '풍거덩 풍거덩'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활기차다. 나는 빈 레인이 있나 훑어본다. 사람이 많아 한 레인에 두 사람 드물게는 세 사람이 함께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저 안쪽 한 레인 앞에 놓인 연두색 물병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쏜살처럼 빠르고 매끈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는 그 남자의 물병이다.

오늘도 여전히 그 남자는 한 레인을 아래위, 양옆으로 온통 휘저으며 헤엄치는데 누가 봐도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사절한다는 단호한 몸짓이다.

한 달 전쯤 빈 레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남자가 있는 레인으로 들어가려고 서서 기다렸다. 그냥 들어갔다가는 부딪칠 게 뻔해 확실히 하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회전해 버리니 함께 해도 되느냐고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물 안에 발을 담그고 기다렸다. 여전히 말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회전을 해버린다. 이 정도로 신호를 줬으니 설마 알겠지 싶어서 그냥 들어가서 수영을 했다. 중간쯤 갔을 때 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딪칠 뻔했다며 짜증을 냈다.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어 속이 부글댔지만, 꾹 참고 조금 하다가 나와 버렸다.

며칠 후 부부가 늘 함께 오던 한 한국 아저씨가 바로 옆 레인에서 나와 똑같은 일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물속에 다리를 내리고 기다렸지만 안하무인, 할 수 없이 수영을 시작한 아저씨, 그 인간이 부딪쳐 목을 다쳤다며 고소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 놓는 것까지 다 보았다. 그 아저씨도 조금 따지다가 기분이 영 아니라며 나가버렸다.

출근 시간이 늦어져 서둘러 나가다가 억울한 생각이 들어 수영장 가드에게 여차여차 따졌다. '다 안다. 모두 안다'며 나를 위로 했다. 탈의실에서 종종 만나는 한 백인 여자가 '나도 안다'며 레인을 휘젓고 있는 그 인간을 기가 막힌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틀 후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났다. 가끔 보던 한 백인 남자가 우리와 꼭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 황당해 하고 있었다. 아무튼, 대충 언쟁이 마무리되고 한 레인에서 그들 둘이 레인을 나눠 쓰는 것 같았고, 나도 옆 레인에서 수영을 계속했다. 레인 저쪽 끝에 다다르니 '안다. 모두 다 안다'고 했던 가드가 나타나 피해자인 그 남자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너 없는 저 남자 나도 안다'고 얼른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노 매너' 하며 겸연쩍게 웃는 그 백인 남자를 보고 안심했다. 그런데 나오면서 유리 벽으로 들여다보니 그 인간은 혼자서 한 레인을 제 세상인 양 휘젓고 있고, 그 백인 남자는 옆 레인으로 옮겨서 수영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 기분 알고도 남았다.

수영으로 온몸을 푼 후 샤워하고 YMCA 문을 나설 때, 하루가 온전히 내 품 안에 안겨드는 상쾌한 기분 정말 그만이다. 하루의 시작이 엉망이 될까 봐 혹은 수영복 차림으로 다투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라 피하고 있지만, 드센 사람 만나 호되게 한번 당해야 할 텐데 싶은 마음 굴뚝이다. 그 인간이 깨지는 고소한 광경을 상상하는 내 속을 들여다보다가 깔깔 웃음보가 터진다. 놀부 마누라 심보 같으니.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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