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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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카우보이와 너구리(여행기5)

2004.01.21 10:25

오연희 조회 수:29 추천:4

12월31일 가족여행 삼일 째날,
오후의 도착 예정지인 유타주의 캐년랜드 국립공원(Canyon Land National Park)으로 달렸습니다. 공원 쪽으로 가는 도로 위엔 저의 가족 외엔 오가는 차가 통 보이질 않아 차츰 불안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저 앞에서 차 한대가 오는 것이 보이길래 얼른 손을 흔들어 세웠습니다. 어른 아이 모두 백인 남자만 가득 탄 차였는데 조금만 더 가면 공원 Visitor Center 가 나올 거라며 아주 친절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조금만 이라는 말만 믿고 한참을 달렸는데도 입구가 나오지 않아 모두들 투덜대고 있는 중에 저어 앞쪽에 뭔가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차고 사람이고 정말 보기 드문 산길에 카우보이가 옛 서부영화에서 보던 바로 그 멋진 복장을 하고 찻길위로 소떼를 몰고 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다가가자 길을 열어 줄려고 소떼를 벌판 쪽으로 유인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웬 희귀한 광경이냐 싶어 저와 아이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카우보이 아저씨와 소떼를 배경으로 사진기를 눌러댔습니다. 카우보이 아저씨는 빙긋이 웃으며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폼을 잡아주었습니다. 너무너무 센스 있는 카우보이였습니다.
즐거운 여행길 되라며 손을 높이 흔들어 준 멋진 카우보이를 뒤로하고 다시 달렸습니다.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공원입구에 드디어 도착, Visitor Center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직원인 젊은 남자의 공원 안내 영화 상영을 저의가족 네 명을 위해서 틀어주는 등 참으로 친절한 안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원을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전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식당을 찾았더니 겨울엔 손님이 많지 않아 식당과 기념품가게는 문을 닫았다고 했습니다. 점심 먹겠다고 동네 갔다 오기는 까마득하고 공원구경은 해야겠고 배는 고프고 정말 난감했습니다.

직원 허락을 받고 화장실에 있는 outlet 에 전기밥솥을 갖다 끼우고 물을 끊였습니다. 준비해간 비상식품인 너구리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너구리가 도무지 끓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의 밥솥은 미국에서 산 건데 일단 일정온도가 되면 꺼졌다가 온도가 내려가면 다시 오르는 그야말로 밥만 할 수 있는 그런 용도였습니다. 라면이 덜 퍼진 것을 그냥 먹거나, 다 익혀 먹으려면 손가락 굵기만큼 퉁퉁 불어터져야 하게 생겼습니다.

“덜 익어도 좋으니 불어터진 것은 싫다” 로 여론이 모아져서 대충 바삭 바삭만 면한 너구리를 먹기로 했습니다. 라면이 들어있는 밥솥을 들고 Visitor Center 밖에 설치되어 있는 Picnic Area에 전을 폈습니다. 종이접시에다가 덜 익은 너구리를 건져서 마지막 조금 남은 김치국물이랑 깻잎이랑 얻어서 먹게 되었는데
먹을 때는 말없이~~라는 영화제목 없나요?
세상에 어쩜 다들 그렇게 조용하던지요?

카우보이 아저씨도 이 맛은 정말 모르실 거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