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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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어느시인의독백

2013.09.11 06:41

최무열 조회 수:233 추천:35



                  오연희 시인님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인 김광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숫자와 결부된다.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생년월일이 결정되고, 뒤따라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된다.

주소의 번지와 우편번호, 아파트 동 수와 호 수, 학교에 가면 학번, 군대에 가면 군번, 외국에 나가면 여권번호, 전화번호와 휴대폰 번호, 은행구좌번호와 신용카드번호, 각종 비밀번호와 자동차 등록번호, 전산 입력 번호와 납세자 번호….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호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과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봉 얼마라는 액수에 얽매여 노예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흘러가면 다시 못 올 시간을 이처럼 숫자놀이로 소진하는 인생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아이덴티티와 화폐와 시간이 모두 숫자로 표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숫자의 교육이 문자의 습득보다 앞서야 한다고 흔히 믿는다.

그러나 내 자신은 목적으로서의 자본 축적을 이해할 수 없고, 시간을 돈과 함께 계량적으로만 파악하는 경영 마인드에 동의할 수 없다. 숫자의 정확성보다 문자의 상징성에 이끌리는 것은 문학인의 숙명적 체질인 것 같다.

그러나 문자를 도구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소설을 써서 전업작가로 입신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시를 써서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 같은 동양의 고전 시성으로부터, 서양의 현대시인 T. S. 엘리엇이나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대개 시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했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생업을 찾기 위해서 많은 방황을 했다.

만 36개월의 군 복무를 끝낸 후 곧장 생업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한때는 외환 금융업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당시의 경제 상황으로 보아 대우가 좋고 선망받는 직장이었다.

그러나 모든 업무가 숫자와 돈으로 귀결되는 일을 나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직으로 직장을 옮겨, 대학원 과정을 끝낸 뒤 장학금을 얻어서 독일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후 삼십여 년을 독문학도로 생활하며 시를 써왔다.

생업과 시업이 똑같이 문학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 것은 남들이 보기에 부러울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삶의 진폭이 좁아진 느낌도 든다.

하지만 문자보다 숫자가 중요한 분야를 감내하지 못한 체질로 보건대, 이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나 자신의 숙명이기도 하다. 어차피 인생은 단선의 궤적을 그리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75년 여름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네 편의 시를 발표한 것이 나에게는 창작의 공식적 출발점이었다.

이른바 데뷔 작품 가운데 ‘시론(詩論)’이라는 시도 있었다. 자기의 시론을 시로써 표현한 시인이 나만은 아니었지만, 첫번째 발표작으로 ‘시론’을 쓴 예는 드물 것이다. 어쩌면 당돌하고 건방진 수작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내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었고, 내 또래 문인들이 문단의 중견으로 발돋움하던 시점이었음을 감안하면, 늦깎이다운 등단 선언이었다.

이 시는 나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첫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동시대의 언어가 권력과 자본에 의하여 조작되고 왜곡되고 훼손되는 현실 속에서 ‘헛된 절망을 되풀이’한 이 시는 첫 시집을 여는 서시로서는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번째 시 ‘영산(靈山)’과 함께 언어와 문학에 대한 나의 시학을 솔직하게 토로한 것이다. ‘언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다만 말하여질 수 없는/ 소리를’ 하나의 형상으로 포착해보고자 시도한다. 끝내 성공할 수 없는 이 시도를 나는 지금까지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시는 오늘날 멋진 아리아가 될 수 없다.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테너나 소프라노의 열창으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아리아가 한때 시인을 의미하던 가객의 몫으로부터 이제는 다른 매체의 인기 직종으로 옮겨갔다.

시인이 아직도 무엇인가 읊조린다면, 그것은 레시타티브에 불과하다. 하지만 노래와 연기를 연결시키며 오페라를 끌고 가는 레시타티브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판소리에서 아니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으로만 판소리가 될 수 없고, 아리아만 가지고 오페라를 꾸밀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은, 시를 아니리나 레시타티브에 비유하는 것과는 물론 다르다.

다만 오늘날의 삶에서 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나는 그렇게 본다. 이 보잘 것 없는 처지에서 시가 예술로서의 필연적 존재이유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품위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다섯번째 시집 제목 ‘아니리’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시의 현실적 입지가 약화되는 현상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더욱 가속화되었다. 아니리나 레시타티브는 적어도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말을 빌리자면 콘텐츠를 전달 내지는 매개하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전자매체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가상현실이 현실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삽시간에 상상의 시공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른바 시적 상상력의 자장이 축소된 반면에, 확대된 현실의 온갖 폭력이 언어를 유린하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시집이 출판되고, 시 전문지도 심심찮게 창간되지만, 시의 독자는 날로 줄어들고, 일부 문인들만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은밀한 속삭임도 못되고, 일방적인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시인은 이제 혼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중얼거리다’는 상대방을 전제로 하지 않고, 메시지의 전달을 원하지도 않는, 글자 그대로 절대적 고백에 접근하는 언술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종언을 개의치 않는 중얼거림이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차렷!/ 한마디로 연대 병력을 움직이고/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목쉰 부르짖음으로 군중을 열광시키고/ 사랑해 당신을/ 달콤한 속삭임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사로잡고/ 짜장면 하나에 짬뽕 둘!/ 경제 성장률 하향 조정!/ 임금 총액 동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자반고등어나 먹갈치 사려!/ 저마다 목청 높여 부르짖는데/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 누가 들으려 하겠는가/ 어디를 가나 그래도 바람결에 실려/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 없고/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얼중얼 중얼…’

나의 일곱번째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에 실린 위의 시는 ‘시론’에서 시작된 나의 시학이 사반세기 동안 천천히 그려온 궤적의 종점 부근이다.

언어에 대한 부정적 절망에서 출발하여, 오백여 편의 시를 쓰는 동안, 아니리를 거쳐서, 겨우 중얼거림에 도달했다니, 이것은 발전인가 퇴보인가 아니면 제자리 걸음인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격동과 변화의 한 세대를 살아오면서 너무나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당신은 중얼거리는 방식이 틀렸다’고 욕을 먹기도 했고, 때로는 ‘참 잘 중얼거렸다’고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는 왜 중얼거리는가’에 관하여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디서나 들려오고 나처럼 ‘한평생 중얼거리는 사람 또한’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중얼중얼/ 혼자서 지껄이는 말’을 찾아와 들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시낭송회를 개최한다든가, 한국 작가들이 외국에서 열리는 작품낭독회에 초대받는다든가, 시낭송을 담은 카세트테이프나 CD가 판매된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사불란한 논리와 정확한 통계숫자와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 사자후를 토하는 광경을 우리는 정치집회에서 자주 보게 된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 때가 되면 온 나라가 확성기의 소음으로 가득차고, 일당 얼마씩에 동원된 박수부대의 연호로 유세장이 들썩거린다.

그러나 밀물처럼 몰려온 이러한 함성의 분출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일상을 되찾은 우리의 주변에서 풀벌레의 노래가 다시 들려오고,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중얼거린다. 소음과 연호가 우리의 귀를 가득 채웠을 때도 이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다만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큰소리로 똑똑히 말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도 인간이 오랜 역사를 두고 간직해온 특유의 언술방식이다.

한번 이 낮은 목소리에 귀기울여보면, 이 세상의 온갖 소란한 외침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며, 한 시간에 걸친 시정연설이나, 숫자로 가득한 삼백 페이지의 경제백서가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될 것이다.

                    독자 최무열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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