驪州八景

2008.09.17 12:25

전기중 조회 수:271 추천:52


ㆍ작성자 전기중  
ㆍ작성일 2007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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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 8경(八景)

8경은 문사(文士)들이 터잡고 살았던 유서 깊은 곳에는 거의 다 있다. 역사가 길고 인걸의 흔적이 남겨진 고을 치고 8경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여주8경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청심루(淸心樓)는 불 타 없어지고 승경중에 완전히 사라진 것도 있고 없어졌지만 재현이 가능한 것도 있으니 설명을 잘 읽으시고 여주 초등학교 뒤편 강가로 나가 ‘청심루터’라는 표석 옆의 긴 의자에 앉아 곰곰이 상상하며 조망해 보시라.

① 神勒鐘聲(신륵종성)
강상사찰 신륵사는 신라 하대 창건이라는 설이 전해지는 천년고찰이나 나옹화상이 이 절에서 입적한 고려말부터 영릉 천장이 완료되어 원찰이 되고 대대적 개수를 마치기까지 백여년 세월이 최절정기였다. 조선 초창기 강성한 왕권의 비호 아래 200칸의 부속 건물이 완성되고 종과 북, 일용집기 등 일체를 새로 장만하였다 하니 이때가 성종3년 서기 1472년이다.
나라 전체의 사찰을 헤아린들 깊은 산중에 명찰들이 위치했으니 큰 물가에 이보다 아름다운 사찰이 있으랴.
충북, 강원, 영남의 유명, 무명 선비들이 신륵사 앞 강을 혹은 지나가고 혹은 유숙하며 수 많은 시문을 남겼으니 고려때의 정포은, 가정, 목은, 한수, 염흥방, 이규보 등과 조선의 퇴계, 율곡, 우암, 유서애, 서거정, 신석북, 손곡, 정송강, 정다산, 서산대사 등 천년 세월동안 국사를 주도하고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 치고 신륵사를 주제로 한 시 한수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물을 건너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는 현대의 소음 공해에 뒤섞여 그 원래 소리의 청량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지긋이 눈 감고 받아 들이면 아득한 옛날 선인들이 느꼈던 그 감흥에 슬며시 빠져들 것이다.

② 馬巖漁燈(마암어등)
마암은 영월루 아래 강으로 뿌리 박은 바위 덩어리로 누렁용마와 검은용마가 이곳의 암혈에서 나와 승천하여 여주의 구 지명이 黃驪(황려)가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큰 다리가 둘이나 놓이고 가로등이 대낮 같으니 상상조차 어렵겠지만 칠흑같은 밤 높다란 절벽 아래 여러척의 배가 불을 켜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면 가까이서 보면 노동의 고통이 있는 안스런 정경이지만 멀리 멀리 청심루에서 바라보면 잔물결에 일렁이는 어선의 불빛은 요즘의 불꽃 놀이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가경일 것이다.

③ 八大長林(팔대장림)
청심루터에서 강 건너를 바라 보면 학동이고 그 앞으로 농경지가 길게 있으니 이 곳이 큰 숲이 있던 자리이다.
본래 조개껍질이 많아 패다수(貝多藪)라고 불리다 세종대왕릉을 옮겨 온 후 정비인 소현왕후에게서 태어난 8대군의 건승함을 비는 의미로 8대 숲이라 했다 한다.
신륵사 승려중에 산직을 정해 지키게 했고 서여(마)는 진상품이어서 봄 가을로 궁중으로 100근씩 올렸다 한다.
그러나 산짐승이 출몰해 사람을 해친다는 코미디 같은 이유로 영조때의 목사 이승규가 많은 면적의 숲을 벌목하여 농경지로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우의정 김치인의 탄핵을 받아 이승규는 파직 되었으니 벌목 자체도 정당하지 못했고 개간 과정과 토지 운영에서 전해지지 않은 흑막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야금야금 없어진 숲은 철종 연간에 완전히 전답으로 변하여 신륵사의 관리가 되었으니 슬프고 슬픈 일이다. 물길이 파고 드는 금모래 은모래 보다는 안고 도는 물길을 따라 백사장도 곱디 고울텐데 약소하게라도 숲을 복원해서 옛 정취를 만분의 일이라도 맛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④ 鶴洞暮煙(학동모연)
학동의 저녁 짓는 연기가 팔대 숲 나뭇사이에 스며들어 서늘한 저녁 노을과 함께 낮게 깔리우는 광경이니 청심루에서 건너다 보노라면 한없이 평화롭고 아늑한 한폭의 그림이다.
고향 떠나 타관객지에 나온 길손이 석양녘 강변에서 이 풍광을 보며 섯노라면 고향 생각에 애잔한 시상이 떠올랐을 것이다. 어쨌거나 도자기 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잘도 올라오니 앞에 팔대숲만 있다면 재현 가능한 풍경이다.

⑤ 燕灘歸帆(연탄귀범)
제비여울은 하리 고대병원 아래 소양천과의 합수지점에서 조금 내려간 곳이니 지금 세종대교 공사하는 곳이다.
범선은 요즘 강에 떠있는 황포돛배 같은 것으로 상선이나 여객수송용이다.
강을 거슬러 돌아오는 돛배는 석양 노을을 깃폭에 가득 담고 청심루를 향해 천천히 올라올테니 가까워지는 배를 바라 보노라면 멀리서 돌아오는 가족이나 벗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반가왔을까.
오늘날 군에서 재현해 놓은 돛배를 타고 음력 7월 보름쯤에 느릿느릿 강을 거슬러 오르며 가야금 타고 시를 읊으며 풍류에 빠져 보았으면 좋겠다.

⑥ 羊島落雁(양도낙안)
양섬은 제비여울에 인접한 섬으로 강에서 내려온 퇴적물이 소양천 물살을 만나 뱅뱅 돌며 생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소와 양을 방목하여 조정으로 거두어 갔다 하니 국가 직영 목장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청심루에서 보았을 때 버드나무가 많아서 ‘楊島’였다는 설도 있다.
읍내에서 자란 친구들은 소싯적에 이곳에서 새 집을 뒤지기도 하고 겨울철에는 땔감을 구하러 들어가기도 했다 한다.
지금도 가을부터 봄까지 찾아오는 물새들이 많은데 그 시절 강을 오르내리는 황포돛배 사이로 날아다니는 물새들의 군무는 가히 장관이었을 것이다.
강의 아래위로는 댐이 생기고, 섬의 주인인 모래는 다 파내가고, 무지막지한 다릿발은 무참히 섬의 점령자로 박히니 양떼가 풀을 뜯고 새들이 노래하던 양섬의 추억은 몽유도원도처럼 몽유양섬도로 그려야 되나....

⑦ 婆娑過雨(파사과우)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요즘처럼 이른 더위에는 청심루에 앉아 음풍농월 하는 것도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다.
더위로 흥이 식어갈 무렵 저쪽 하류에서 검은 구름과 함께 시원한 소나기라도 몰려오면 더위를 식혀주는 비바람의 소쇄로움에 마음이 상쾌해지고 흥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⑧ 二陵淸風(이릉청풍)
여주를 대표하는 유적은 누가 뭐래도 영릉이니 어찌 8경에 빼놓을 수 있으랴.
선인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승경을 칭송했지만 영릉에서 불어 오는 맑은 바람을 8경에 넣어 세종대왕의 애민애족하는 정신과 효종대왕의 북벌설욕을 되새기게 했으니 참으로 슬기로운 우리의 조상님들이시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에 무슨놈의 8경 타령이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 땅 여주의 자연과 함께 생을 나누었던 선인들이 노래했던 승경들이 하나씩(조선시대에 없어진 것도 있지만) 사라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머릿털 빠짐을 감수하며 자료를 뒤적여 청심루 옛터를 서성이며 횡설수설 써 보았다.

※ 神勒鐘聲(신륵종성)은 神勒暮鐘(신륵모종)이라고도 하는데 鶴洞暮煙(학동모연)과 暮자가 겹치고 해질녘 종소리 보다는 밤이나 새벽 종소리를 노래한 시가 많아서 ‘신륵종성’을 따랐다.
※ 二陵淸風(이릉청풍)은 二陵杜鵑(이릉두견)의 설이 있으나 두견새 소리는 너무 처량하기도 했거니와 二陵淸風의 風과 婆娑過雨의 雨가 댓구(對句)가 되기에 ‘이릉청풍’의 설을 택했다.
※ 여주8경에 대한 다른 견해나 좋은 자료가 있어 일러 주시는 분은 후사하겠으니 세종신문으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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