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한인 농민열전.1> (남가주 녹색 농민신문 . 케빈 리 기자)

2008.12.12 09:16

케빈 리 기자 조회 수:514 추천:70

<남가주한인농민열전 1>

미국내 한인동포는 250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이중 100만 가량이 남가주에, 100만 가량이 뉴욕 인근에, 그리고 나머지 50만 가량이 시카고, 시애틀, 휴스턴 등지에 흩어져 거주한다.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한인타운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한인농민들은 예외다. 도시가 아닌 농촌에 거주하는데다, 농촌에서마저도 분산되어있기 때문에 그 양상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에 사는 한인동포들마저도 한인농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모른다.

<남가주한인농민열전>은 미국 남가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한인들 이야기다. 간단하게는 한인 커뮤니티에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고, 더 바라기로는 이를 통해 한인 농민들끼리 서로 네트워킹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 편집자주

“나는 인생의 밭을 가는 허름한 농부”

남가주 한인농민 원조 정용진 선생

정용진 선생(70세)은 남가주 한인농민의 원조격이다. 한인 마켓도 변변치 않았던 1977년 LA 인근 온타리오에 ‘온타리오 선 농장’을 설립, 총각무를 심어 대박을 떠트렸다. 한국에서 즐겨먹던 채소를 그리워하던 미주 한인들이 총각무에 흥분해버렸던 것이다. 이를 등에 업고 처음에 2.5에이커(한 에이커는 약 1200평)로 시작한 농토가  곧 6에이커로 그리고 4년 반만에 열배도 넘는 30에이커로 늘었고, 부부끼리 일하던 것에서 12명의 인부를 데리고 일하는 ‘경영’의 단계로 도약했다. 당시 그가 생산했던 풋배추, 조선무, 고추, 호박, 열무, 부추는 멀리 뉴욕, 알래스카에서도 주문이 있을 정도로 인기였다.

원래 농업에 대해 경험이 있었습니까?

제가 대학에서는 법학(성균관대 법학과)을 전공했지만, 실은 고등학교는 여주농고를 나왔습니다. 대학 다니는 중에도 정신여고에서 원예반을 지도했고, 대학 졸업 후 우석중고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도 ‘영농 원예’에 대해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러니 농업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럼 미국에 오신 것도 농업 때문에 왔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원래 유학으로 왔지요. 1971년도에 미국에 와서 우드버리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요. 그 다음엔 작은 식품점을 3년 경영했는데, 이때 ‘흙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미국에 온지 6년만에 농사를 짓게 되었지요.

하지만 한인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터졌다. 무언가 된다는 소리가 들리면 우르르 몰려드는, 그래서 서로 끌어내리는 일이 한인채소농업에도 벌어졌다. 선생은 나름대로 이를 극복해보려는 의지도 있었다. ‘남가주한인협동농장’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서로 윈윈하는 분위기를 한인농민들 사이에서 만들어보려했다. 하지만 서로의 이해가 충돌하는 통에 흐지부지되어버렸다. 결국 그동안 보람도 느끼고, 농장을 늘려가는 재미도 쏠쏠했던 한인채소농업에서 재미를 잃었다. 1983년, 선생은 채소 농장을 처분하고, LA와 샌디에고 중간 쯤인 Fallbrook이란 곳에 장미농장을 만든다. <에덴장미농장>이 그것이다.

<사진 - 위에서 본 에덴장미농장 전경. 어떤 미국인 비행사가 비행

중 '농장이 너무 이쁘다'며 찍어서 보내줬다고 한다.>

하시던 일을 접고, 새로운 일을 하시려고 하니 힘드셨겠습니다.

그렇습니다. 20 에이커 정도 되는 땅을 샀는데, 원래는 이곳에서 어떤 미국인이 장미밭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장미농장’이라고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해서, 다섯명의 일꾼을 데리고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곧 6만주 넘게 장미를 심은 농장으로 성장했습니다.  

장미농사는 채소농사와 어떻게 다르던가요?

남가주는 따뜻하기 때문에  일년내내 채소재배가 가능합니다. 수입이 계속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장미수요는 시즌을 탑니다. 발렌타인데이, 어머니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기념일에 많이 팔리지요. 이런 날을 잘 염두에 두면서 장미를 관리해야합니다.

실례지만 수입은 좀 어떠했습니까?

한창 때는 연 50만불 매출도 올려봤습니다. 어떤 해인가는 발렌타인 데이 전후로 두주 동안 15만달러어치를 팔았던 적도 있지요. 전반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장사였습니다.

<사진 - 에덴장미농장에서의 정용진 선생 내외>

하지만 이 장미농사에도 위기가 닥쳤다. 이번엔 외부로부터였다. 1994년 미국이 카나다, 멕시코와 맺은 자유무역협정, 나프타가 문제였다. 이 협정 이후 멕시코에서 생산된 값싼 장미들이 물밀듯 미국에 들어왔다. 특히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캘리포니아는 그 여파가 더 컸다. 한때 한 송이에 2달러 50센트까지 받아봤던 장미가 50센트까지 추락했다.

선생은 2002년, 35만불어치 장미묘목을 갈아엎는다. 약 20년 동안 땀을 쏟았던 장미농사를 포기하고, 다시 한인채소 농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선생은 이후 2008년  7월까지 한인채소를 심는 농장을 운영했다. 그리고는 올해 2008년 70세를 맞아 은퇴를 선언했다. 지금도 농업을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 사업적 측면보다는 여가생활의 측면이 강하다.

오래간만에 한인채소 시장에 들어가보니 어떠했습니까?

농업에 진출한 한인들이 많이 늘었더군요. 하지만 그만큼 한인 인구들도 늘고, 또 한인 마켓들도 늘었습니다.

남가주에 한인농민들이 얼마나 되는 것같습니까?

글쎄요, 한 30명 정도 될까요?

미국에 오는 한인들은 많지만, 농업쪽으로 방향을 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같은데…

옛날에는 그랬죠.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다릅니다. 농업을 목표로 오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인농민들은 한인마켓에만 집중합니까? 언어 문제 때문에 그런가요?

그보다는 자본과 규모, 그리고 나프타 때문이 아닐까요? 미국의 농부들은 어마어마한 땅과 자본을 갖고 기계식 영농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인농민들처럼 십여 에이커의 땅으로 경쟁하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게다가 나프타로 인해 멕시코산 농산물이 그냥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한인농민들의 입지를 찾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나름의 경쟁력이 있는 한인채소시장에 목숨을 거는거죠.

그렇다면 한인채소를 주류시장 쪽으로 확산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한번은 한국 참외를 주변의 미국인들을 초대해서 먹여본 적이 있었습니다. 표정들을 보니, ‘맛이 나쁘지는 않지만, 좀 이상하다..’는 것같더군요. 사람은 어머니가 가르쳐준 맛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것같습니다. 우리도 이민와서 아직도 된장국 먹고, 김치찌게 먹지않아요?

선생은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첫아들 제임스정(정지신)은 UCI 영문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Business Wire 신문사의 기자로 일한다. 며느리도 기자다. 둘째아들 죠셉정(정지민)은 하버드 영문과를 졸업하고 월튼 비즈니스 스쿨을 거쳐 이베이 프로덕트 매니져로 일했다. 지금은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 며느리 역시 하버드대 출신으로 지금은 샌프란시스코 증권회사의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선생은 자식들 이야기를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미국 동포들이 유일하게 이민생활의 고충을 잊을 때 – 잘나가는 자식 이야기할 때이다.  

자, 이쯤해서, 빠뜨리면 안되는, 정용진 선생에게 농민으로서의 경력보다 유명한 경력을 공개해야한다.

사실 정용진 선생은 유명한 시인이다. <금강산> 등 본인 명의의 시집도 4권이나 냈고, 미주한인문인협회 회장도 지냈다. 영문시집도 발간했고, 국제 시인협회 우수작품상도 받은 경력이 있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고은 선생은 그의 의형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농민으로서의 정용진 선생보다는 시인 정용진 선생에 더욱 익숙하다.

<사진 - 정용진 선생을 아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용진 선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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