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춤이나 춥시다

2008.12.29 23:41

정용주 시인 조회 수:575 추천:62

누구나 가슴 속 저 밑바닥부터 물큰 거리며 감정을 뒤흔들고야 마는 추억이란 이름의 앙금 정도는 진득하니 붙들어 놓고 산다. 그런 애잔한 울림의 추억은 더러는 듣는 이를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얼큰해지게 만들고야 만다.

소설가로 데뷔를 하였으나 다시 시인으로 자리잡은 정말이지 지겨울 만큼 오래전부터 알고지내던 박주하란 시인이 있다. 어느날 그 시인이 문득 전화를 해 왔다.



“오빠, 어디야?”

“응 어디 좀 가려고 길 나섰어.”

“근데 나 누군지 알어?”

“인자 아냐?”



당연히 거리낌없이 오빠라 하니 의당 울산에 시집가 사는 여동생 이름부터 댔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 됐다 싶은 건 전화번호가 영 낯설다. 아차 싶었다.



“아, 주하구나. 그래 무슨 일인데?”

“응 오빠 책 하나 선물 하려고.”



책선물이라면 이런 산촌에 사는 나로서는 더이상 반가운 일이 없다.



“주하 망원동 산다고 했지? 나 지금 망원도 가는 길이다. 오늘 줘라.”

“정말 서울 오는거야?”

“그렇다니까. 망원동 7번 출구로 7시 30분까지 와라.”

“알았어, 오랜만에 술 한 잔 마시지뭐.”



그렇게 다른 볼일로 서울에 가는 길에 후배와 약속을 하고 망원전철역 7번 출구앞에서 만나 가까운 복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집은 쭈꾸미볶음을 기막히게 한다. 가격도 1인분에 5,000원으로 식사를 포함하여 국과 몇가지의 반찬까지 준다. 제법 오래전부터 단골로 다니던 터라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 책 두 권을 선물로 내민다.







글을 쓰는 동생이니 당연히 자신의 책을 선물로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낯 선 이름이다. 제목도 이 동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최소한 40 중반은 넘겨야 그 문화를 조금이나마 경험을 했을 ‘고고춤이나 춥시다’니, 이 동생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책 겉장을 들춰 지은이의 약력을 보니 1962년생의 치악산 자락으로 들어가 사는 시인의 산문집이다.



책은 나중에 읽기로 하고 식사를 하며 두어병의 소주를 나눠 마셨다. 내일은 손아래 동서가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를 봐주기로 했다며 더 이상은 마실 수 없단다. 나도 다른 약속이 있어 배웅을 해 주곤 택시로 촬영소고개를 넘어 마포방향으로 향했다.




시인 정용주의 산문집 「고고춤이나 춥시다」가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산문집은 70년대에 10대를 보낸 시인이 좌충우돌 쏘다니던 어린 시절과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촌철살인의 표현으로 재미있게 그려냈다. 흡입력 있는 문장과 시인 특유의 짧은 사유가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들을 영화처럼 부각시키는 게 특징인데, 표지부터 나는 다니지 못했으나 여름휴가면 방학을 맞은 동무들과 오색의 약수터 위에서 어울려 추던 고고춤이 문득 생각나는 그림이 자리잡고 있다.

당시엔 빨간바께쓰(byaketsu:바께쓰는 사실 일본어다. 우리말로는 양동이가 맞겠지만 프라스틱으로 만든 그걸 양동이로 부르기엔 뭔가 잘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이 든다.)로 하나 가득 막걸리를 받아들고 날 저문 약수터 위로 가면 여고생이나 여대생들이 제법 많았고 남학생이 있어도 게의치않고 어울려 술을 나누곤 할 수 있던 호기도 부렸다.

당시엔 뭐 제대로 스텝이니 그런 건 필요도 없이 말 그대로 지랄발광에 가깝게 몸을 뒤흔들며 무언가 삭이지 못한 울분 같은 걸 풀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로만 여겼다. 그것도 여름휴가 10여일 중 날이 좋은 경우엔 일주일을 줄곳 약수터 위 솔숲으로 가곤 했으니 나의 사춘기는 그곳에서 넘긴 듯 싶다. 아마도 이마가 넓고 행동이 사회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제법 성숙한 탓에 대학생들도 자신들의 또래로 지레 짐작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쓴 시인과 비슷한 연배의 대학생들이 당시 우리와 어울린 듯 하다.

동무들은 절대로 교복의 푸르스름한 셔츠와 잿빛바지로 이루어진 하복은 입지 않았다. 런닝셔츠에 교련복을 단추는 끌러 입거나 형들의 군복이나 셔츠를 몰래 입고 나왔다. 최소한 그런 차림은 해야 나이 두어살 정도는 위로 보아준다는 사실을 관광지인 오색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나의 경험이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책을 며칠동안 짬짬이 읽으며 피곤한 눈을 부빈 경험부터 소개해야겠다.



저자 정용주 시인은 2003년 여름부터 치악산 금대계곡 흙집에서 살다고 소개되어 있다. 시인은 마치 도인처럼 이곳에서 시도 쓰고 나무도 하고 벌도 키우고 글도 쓰면서 세월을 낚으면서 살지만, 젊은 시절에는 많은 방황과 도전을 하면서 말 그대로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아온 듯하다.

7남매의 막내자 쉰둥이로 태어난 저자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늙어 있던 아버지와 아버지뻘인 둘째 형님 부부 등으로 구성된 가족 사이에서 방물장수로 곳곳을 다니며 물건을 파는 어머니를 그리며 유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고 덤덤한 것들조차도 시인의 눈에는 유난히 의미가 부각되고 섬세하게 인식되는 것들이 많았던 듯하다.

이 책 「고고춤이나 춥시다」는 그런 시인이 벼린 섬세한 촉수를 가다듬어 꼼꼼히 적은 성장에세이이다. 여주의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경험한 것들과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와 겪는 사춘기 소년의 심적 변화, 그리고 이유 있는 반항심이 깃든 행동들이나 읽는 이들에겐 부담이 없을 글맛 뛰어나고 서정성 풍부한 문체로 소개되어 있다.







미소가 여전히 고운 이 동생이 선물한 이 책은 울컥 내 유년의 시대로 돌아가게 만든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산문집에서 1부 ‘하루해는 어떻게 가나’는 시인의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들이다.

특히 소풍날 라면땅 한 봉지 사기도 전에 군것질할 용돈을 모두 야바위꾼 아저씨의 손장난에 날려버린 일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경험했던 16살 때의 평화시장(지금의 전태일 동상이 있는 자리)에서 순식간에 10,000원이라는 거금을 야바위 당한 일이 떠 올랐는데, ‘나는 종지에 손을 얹고 주머니에서 50원짜리 백동전을 꺼내놓았다. 10원만이요, 하고 말하려는 순간 벌써 아저씨는 종지를 뒤집고 있었다. 거기엔 주사위가 없었다. 종지가 드러낸 그 하얀 맨땅을 보자 현기증이 났다. 번개처럼 많은 생각들이 스쳤으나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집합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남들은 이제 시작인데 나는 소풍 끝이었다. 젠장, 라면땅이라도 하나 사놓을걸! 「소풍과 야바위꾼」’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겨울날 학교 가기보다는 새끼줄 기차놀이에 더 열중인 동네 아이들, 마을 대항 체육대회날은 당연히 학교 수업 빼먹는 날이고, 술 취한 엿장수의 리어카를 끌어주는 척하며 엿 훔쳐 먹기나, 초등학교 졸업 후 집안 형편 때문에 바로 중학교로 진학을 못하고 어린 농사꾼으로 1년을 지내면서 겪는 마음의 상처 등……. 굳이 주인공이 정용주 시인이 아니어도 70년대 궁핍한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대부분의 40대 이후 세대라면 경험해봤음직한 이야기들이라 더욱 애틋한데 나라고 별반 다를바 없는 일이다.



2부 ‘서울 물 좀 먹어보자’에서는 1년을 어린 농군으로 지내고 중학교를 들어가니, 어느새 다른 또래보다는 조금 어른스러워진 주인공이 겪은 에피소드들이다.

생애 처음으로 맞은 여선생님께 드리려고 이른 새벽 진달래꽃을 꺾었다가 결국 버리고 만 일은 서서히 이성에 눈을 떠가는 소년이 겪은 일로, ‘오늘은 누구보다 빨리 학교에 가야 했다. 혼자서 산길로 접어드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함초롬히 핀 연분홍 진달래꽃 무더기에서 파란 물이 묻어나는 가지를 꺾었다. 한 다발의 진달래꽃을 들고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뛰어 교실로 들어갔다. 고요한 교실에 쿵쿵 뛰는 내 심장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교탁 밑에 놓인 빈 꽃병을 올려놓고 꽃을 꽂았다. 수줍게 웃는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첫 여선생님」’고 이야기는 전개하다 동급생들이 등교를 하는 걸 보곤 제풀에 그 꽃을 축대 밑 배수로에 버리고 만다.

동창 여자애들로부터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기도 하고, 난생 처음으로 자기 몸을 흔들어 고고춤이란 걸 추면서 야릇한 흥분도 경험도 한다. 서울로 전학을 와 변두리 동네에서 살면서 시골 전학생으로서 겪는 여러 알력들이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마냥 즐겁기만 하던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고 서서히 이성에 눈을 떠가면서 자신이 처한 형편을 인식하고 조금씩 반항스레 변해가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이 그림으로 그린 듯 솔직하기만 하다.



3부 ‘설익은 인생의 맛’에서는 누구나 겪을 사춘기의 반항하는 10대 시절 이야기다.

일탈을 하면서도 그리 과감하지는 못하고, 나름대로 남자들 사이의 멋진 우정도 키워가며 드디어 첫사랑의 여학생을 만나 연애편지도 주고받고 첫 키스도 경험하지만, 자신의 사랑이 너무나 초라해서 이별을 선언하고 만다.

뭔가 변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길도 출구도 없는 상태에서 가출을 감행하는 10대의 모습이 바다 위에 출렁이는 조각배처럼 위태로운 건 요즘 세대들이라도 다시 불혹을 맞고 돌이켜보면 마찬가지의 모습은 아닐까.







김장배추를 절이며 피곤한 몸으로도 밤 늦도록 낄낄거리며 읽었던 낙엽빛 고운 이 책은, 이제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 읽기를 권하며 짧게 두 부분의 이야기만 더 소개 하겠다.



“얌마! 너 일어나”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내가 반공이 뭐라고 얘기했어?” 마지막 시간이라 긴장도 풀리고 영성이와 연애편지로 장난을 치던 터라 나도 모르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저……반공은……, 공을 반으로 쪼갠 거요!” 하고 대답했다. 순식간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을 웃겼다는 것으로 으쓱해지는 순간 마주친 선생의 눈빛은 불길했다. “너희 두 놈 이리 나와!” 번쩍 하고 따귀에 불이났다. -「너, 다시 한번 말해봐!」




얼른 가방에 빨간 책을 쑤셔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종례고 뭐고 집으로 달려가 다락방으로 직행하고 싶었다. 저만치부터 뛰어온 영성이가 어깨를 툭 치고 “내일은 내 차례다!” 씽끗 웃고 돌아섰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락방으로 들어가 느긋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빨간 책을 꺼냈다. 그런데 이 자식들이 어찌나 중간 중간 결정적일 때마다 한 장씩 뜯어냈는지 여관만 들어가면 다음 페이지가 없었다. 이렇게 안타깝고 짜증나는 순간은 내 생에 처음이었다. -「빨간 책」



그렇다.

한때는 남몰래 숨기고만 싶던 이야기도 슬그머니 꺼내놓아도 남사스럽지 않을 만큼 성장하였으며, 그만큼 낯짝 두꺼워진 적당히 부끄러운 속내를 드러내고도 웃을 줄 아는 나이가 불혹이다.



제   목 : 고고춤이나 춥시다

지은이 : 정용주

펴낸곳 : 푸르메(02)334-4285~6

펴낸이 : 김이금

정   가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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