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상록수' 이삼우 기청산 식물원장<경북 포항>

2009.08.28 22:17

문갑식 조선일보 기자 조회 수:893 추천:122

"큰 나무 밑에 큰 인물이 납니다"
"빨리 자라는 외국 수종만 찾으니 토종 나무는 다 말라가요"
수목(樹木)의 보물창고는 주택가 골목 끝에 있었다.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月浦) 해변의 파도를 뒤로 한 채 승용차로 10여분을 달렸을 때였다. 누군가 요술을 부린 것처럼 2만5000평 낙원(樂園)이 나타났다.

기화요초(琪花瑤草) 만발한 식물원의 이름은 기청산(箕靑山)이다. 벼에서 잡티를 골라내는 게 키다. '기'는 키를 뜻하는 한자다. 청산은 유토피아, 샹그릴라,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理想鄕)과 항렬이 같다.

관람객을 받지 않는 월요일 오후 식물원은 적막했다. 숲의 향취가 더 두드러졌다. 그 순간 도인풍(道人風)의 주인이 나타났다. 밀짚 모자에 청색 개량 한복 차림이다. 이삼우(李森友·69) 원장이 기자를 안으로 이끌었다.

난생처음 보는 이름들이 길 따라 이어졌다. 산거울, 옥잠난, 새우란, 각시원추리, 왕도깨비가지…. 하나같이 우리 풀, 우리 꽃, 우리 나무다. 이것을 이삼우는 우리 산과 들을 헤매며 캐냈다. 40년 세월이다.

"길을 보면 뭔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입구가 사람의 입(口)처럼 좁다. 식도(食道) 뒤는 위장처럼 불룩하다. 마지막은 뭐냐고 물었다. 그가 허허거렸다. "구린내 나는 풀만 심었지요."

▲ 박동주 인턴기자(중앙대 사진과 3년) 왕도깨비 가지를 자식처럼 쓰다듬으며 농부가 웃었다. 이 땅의 산과 들을 40년 동안 헤매며 우리 풀, 우리 꽃, 우리 나무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지만 정작 그는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활짝 갠 가을 하 늘 같은 날이 농부에게도 올 수 있을까. / 쏴~ 하는 바람이 지나가자 대나무들이 합창을 했다. 농부는“왜 사진기자들은 식물원에만 오면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 하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기자는“빨리 웃으세요”라고 했다.

■소년과 상록수

1935년 잠자던 식민지 청년들의 혼(魂)을 뒤흔든 소설 한편이 나왔다. 심훈의 '상록수(常綠樹)'다.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밝은 미래를 등졌다. 그들은 거대한 문맹(文盲)의 늪으로 뛰어들었다.

소설이 나온 지 5년 뒤 이삼우가 태어났다. 고향이 지금 식물원이 있는 포항시 청하면이다. 선고(先考·이종호·李鍾虎·1977년 작고)는 유지였다. 9000평 과수원에 청하중 재단 이사장으로 일대에 이름이 쟁쟁했다.

소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일어났다. 전란(戰亂)을 피해 소년은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주머니 속 송곳 같은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대구중을 거쳐 영남 인재가 모인다는 경북고에 합격했다.

사람들은 그가 육사 아니면 서울대 법과나 상과를 택할 것이라고 믿었다. 판·검사, 공무원이 되거나 평생 다 쓰지 못할 부(富)를 깔고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대 농대 임학과를 택했다.

서클 친구들은 "너 제정신이냐"고 했다. 그는 4년 후 다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낙향을 선언한 것이다. 남들이 관계로, 재계로 진출할 때 그는 박동혁과 같은 삶을 살기로 했다.

―왜 고향에서 살기로 했습니까.

" 어렸을 적부터 농사를 좋아했어요. 방학 때면 시골로 와 부친의 일을 도왔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 영향도 있었지요. 젊은이들이 농촌을 뒤로 할 때였어요. 농고를 나온 그분은 "농업에, 농촌에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농부가 될 생각을 그때부터 했어요."

―영남은 관(官)에 대한 평가가 높지요. 열망도 있고.

" 경북고가 비슬산 앞자락에 있습니다. 당시는 학원이 없어서 수업이 끝나면 교실에 남아 자습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창 밖을 내다 보면 하나같이 민둥산이었습니다. 안쓰러웠어요. 저런 산을 푸르게 만들 수 없을까 하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하면 할 수 있다는 젊은 객기(客氣) 같은 게 생겼습니다."

―흔히 선생의 삶을 소설 '상록수'에 비유합니다.

"그 시대 젊은이들에겐 소명(召命) 의식 같은 게 있었습니다. 계몽이랄까 애국이랄까.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 이야길 해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요."

―진짜 소설 속 주인공 박동혁처럼 되고 싶었습니까.

" 어느 정도는 있었지요. 매년 농활(農活)을 갔으니까요. 저는 오지 중의 오지였던 울릉도를 택했어요. 화장실 청소도 해주고, 약도 쳐줬지요. 지나고 보니 오히려 신세를 진 건 저더군요.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저쪽, 인체의 간(肝) 위치에 있는 게 울릉도입니다. 그곳의 풀과 화초를 옮겨 왔어요. 울릉도 식물원 조성 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농대를 선택한 뒤 주변의 반대가 심할 때 흔들리지 않던가요.

"말이 많았지요. 우리 반에서 농대를 택한 건 저 하납니다. 농부가 원래 변절을 잘 안합니다."

―아버지가 실망하지 않던가요.

"오히려 부친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혹시 성적이 안 좋았나요.

"제가 경북고 신입생 1200명 가운데 150등으로 입학했습니다. 졸업식 때도 우등상을 탈 정도는 됐는데, 졸업장만 받고 중간에 나와버렸지요."

―왜요?

"고 3 마지막 체육시험에서 70점을 받았거든요."

―점수가 낮게 나왔다고 그런 행동을 합니까.

" 체육시험이 배구 토스였어요. 제가 원래 운동 소질이 조금 있었습니다. 배구에서는 센터나 레프트 공격수를 했습니다. 소프트볼도 투수 아니면 1루를 맡을 정도였어요. 저는 90점 이상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못 참지요. 제가 고집이 조금 셉니다."

―졸업 후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 지도교수께서 임업행정을 공부하라고 했어요. 그 길로 계속 갔으면 산림청장이 됐을지도 몰라요. 4학년 1학기 때 그 교수께서 미국 연수를 가버렸어요. 짧은 외도(外道)였지만 저는 '아! 농촌에 가서 살라는 계시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날로 텅빈 연구실을 나왔습니다."

―그 인연을 놓친 게 후회되지 않습니까.

"질량불변(質量不變)의 법칙이라고 있지요. 농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만큼 에너지를 쏟으면 그만한 보답을 줍니다. 농민도 잘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규모가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요."

―이름이 본명입니까? 특이한 한잡니다.

"개명을 했지요. 본명은 석삼 자 비우 자 삼우(參雨)였습니다. 돌림자 때문인데 밑도 끝도 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꿨지요."

■청년 농부

고향 청하중에서 이삼우는 강사 생활을 했다.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2년간 했다. 월급을 모아 땅을 사들였다. 1969년, 기청산 식물원의 모태(母胎)인 기청산 농원 간판이 걸렸다. 그는 수박, 배추, 콩을 심었다.

본격적인 농부의 삶을 시작하자 아버지가 땅을 떼줬다. 그 사이 그는 청하중 재단 소유 농장을 맡기도 했다. '재단 서무과장'처럼 지낸 시대였다. 농사 짓는 한편 빈땅에 관상수를 심으며 그는 나무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리 임학과를 나왔다지만 농사는 어렵지요.

"학교에서 배운 것과 농사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다가는 굶어 죽겠다는 생각도 들곤 했습니다."

―나무의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 과수를 가꾸다보니 우리나라가 식물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관상수가 하나같이 외국 수종(樹種)뿐이었어요. 우리 것이 사라진 거지요. 그걸 알고 오기가 생겼습니다. 구박받는 우리 풀, 꽃, 나무를 찾아내고 보급하는 게 애국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푸대접받는 것에 대한 반항심 같은 게 유별납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외국 수종이 대개 속성수(速成樹)입니다. 속성수는 위는 큰 데 뿌리는 얕은 가분수꼴이지요. 태풍 '매미'가 왔을 때 대구 시내 가로수 4000그루가 모두 쓰러졌어요. 히말라야 시다였습니다. 제가 그 위험을 경고한 적이 있어요. 게다가 히말라야 시다는 자라면 음산한 분위기가 나요. 요즘 나무 한 그루 베는 데 50만원이 듭니다. 그 비용만 해도 얼맙니까. 집도 차도, 사람도 나무 때문에 다친다고 생각해보세요."

―경고가 왜 안 먹혔습니까.

"시골 농부 말을 누가 듣겠어요."

―우리 나무 중에 가로수로 적당한 건 뭡니까.

"느티나무가 제일 무난하지요. 토질에 따라 모감주 나무, 회화나무도 좋지요."

―외국에서 온 나무는 다 배제해야 하나요?

"외국 수종 중에도 20% 정도는 좋은 것이 있어요. 잘 가려서 들여오면 괜찮습니다. 문제는 외국 것이면 모두 좋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나무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유포됐고 나무 후진국이 됐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요.

"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 이야기를 해볼까요. 보리수는 산스크리트어로 '보디브리크샤'라 불립니다. 원래 보리수는 우리 보리똥나무라는 활엽수입니다. 씨앗이 꼭 보리쌀처럼 생겼어요. 그런데 보디브리크샤가 중국을 거치면서 보리수가 돼버리자 우리 보리똥나무는 잊혀졌어요. 슈베르트의 가곡 중에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라는 노래도 있지요."

―그게 보리수가 아닙니까?

"원래 구주피나무입니다. 바둑판 만드는 데 쓰이는 피나무의 일종입니다. 사람들이 그걸 보리수로 착각했지요. 제대로라면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구주피~'로 불러야지요. 하하하."

―우리나라에 산이 70%라는데 왜 그리 나무에 대해 무지할까요.

" 우리가 흔히 아카시아라고 부르는 나무도 실제 학명은 '가짜 아카시아'입니다. '개 아카시아'라고도 하고요. 뒤늦게 이걸 알았지만 어떻게 '가짜'니 '개'니 하는 말을 붙이겠어요. 요즘은 아까시나무라고 하지요. 보급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키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무뿐 아니라 꽃도 그래요. 개망초, 토끼풀, 달맞이꽃이 다 외국에서 들어온 꽃들입니다."

―제대로 안 키우면 어떤 일이 생기는데요.

" 저기 오크나무 잎이 보이지요? 핀오크라고도 하는데 서울 옛 양정고 터의 손기정 공원에서 얻어온 겁니다. 옆에 있는 원래 잎보다 훨씬 두툼하지요. 히틀러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마라톤 우승을 한 손 선수에게 준 건데 원래 저런 모습이어야 해요. 관리를 잘못해서 저렇게 왜소해졌지요."

―어떻게 관리해야 합니까.

"우리는 보호수로 지정되면 울책부터 두르잖아요. 사람 보호한다고 가둬 놓으면 좋겠습니까? 나무 밑에는 가로등 만들어놓고 잔디 심고 경계석 세우고 주변에 어린 나무까지 심고, 손기정 선수 나무가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해놓았더군요."

―그때도 지적을 했나요?

"서울시에 편지도 보내봤지만 누가 귀 기울여줍니까? 주변에 있는 것부터 모두 허물면 회복시킬 수 있어요. 10년에서 20년쯤 걸리겠지만요."

■식물원을 향한 여정(旅程)

낮이면 농사짓고 밤이면 한국식물도감을 뒤적이던 그에게 전기(轉機)가 찾아왔다. 한국식물원협회 창립 때 기부금을 두둑이 낸 탓에 감사에 이어 부회장 감투가 떨어진 것이다. 얼마 안 지나 회장이 임기 중 사퇴했다.

수석 부회장이던 그는 뜻하지 않게 한국식물원협회장에 오르게 됐다. 반(半)은 농원, 반은 식물원처럼 운영하던 그도 결심을 내려야 했다. "한마디로 촌부(村夫)가 우리 꽃 보급운동하는 두목(頭目)이 됐지요."

―당시 식물원이 몇 개였기에 협회가 만들어졌습니까.

"국립수목원과 여미지 식물원 정도였지요. 식물원협회는 식물원을 확대하자고 만든 단체였습니다."

―농원에서 식물원으로 전환할 때 고민했겠지요.

" 고민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내심 자신은 있었어요. 제 은사로 작고한 이창복 박사님이 식물학계의 권위잡니다. 어느 날 제가 수집해 놓은 풀과 꽃과 나무를 보러 부인과 함께 오셨어요. 환갑 잔치를 겸한 여행이었대요. 제 농원을 둘러본 뒤 '식물원 해도 좋겠다. 한국에 이런 농원이 어디 있느냐'는 평가를 내리셨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제자의 작품이니 그분도 흡족하셨겠죠."

―모델로 삼은 식물원이 있습니까.

"일본 영국 캐나다 독일을 다녀봤지요. 일본 하코네(箱根) 습생식물원이 참 괜찮았는데 우리와는 사정이 달랐어요. 그쪽은 습지이고 우리는 자갈이 많았거든요. 결국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만의 것이 뭡니까.

" 제가 농부지만 철학을 조금 공부했어요. 젊었을 때는 단테의 '신곡(神曲)'을 끼고 살았고 니체 키르케고르도 공부했지요.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임어당(林語堂)의 생활철학이었어요. 저는 자연 그대로인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식물원은 인공 요소가 없어요. 저기 길 가운데 풀이 돋아나 있지요? 제가 뽑지 않고 그냥 놔뒀어요. 연세든 분들이 '아이고, 이 풀을 여기서 보네'하며 좋아합니다. 반면 세속적인 식물원을 생각하고 온 분들 중에는 간혹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청산 식물원의 수목은 몇 종류나 됩니까.

"2000종쯤 됩니다. 토종이 80% 이상이지요. 그중에는 섬개야광나무, 섬시호, 큰연령초, 망개나무, 연잎 꿩의 다리, 노랑무늬 붓꽃 같은 41종의 멸종 위기 식물이 있습니다."

―어떤 식물원이 으뜸입니까.

" 이른바 조경(造景)은 네 가지입니다. 요즘 허브농장이 많지요? 향기를 맡는 코 조경입니다. 식용식물이 있으면 맛을 보는 맛 조경이 되고요, 눈으로 즐기는 건 색(色) 조경입니다. 기청산 식물원에는 한 가지 더 있어요. 소리 조경입니다."

―지금 들리는 저 음악 말인가요?

" 그게 아니고 새들이 깃들어 지저귀는 소리입니다. 단위 면적당으로는 우리 식물원에 새들이 한국에서 가장 많을 겁니다. 농약을 안 치기 때문이고 먹을 게 많은 이유도 있지만 전체 식물의 80%가 우리 것이라는 게 원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새들도 자기 것을 좋아하잖아요. 봄 가을이면 새소리가 대단해요. 겨울이면 직박구리 천지가 되고요."

―식물원은 어떻게 운영하는 겁니까?

"식물원은 풀이나 꽃 하나를 팔면 그 자리에 산에서 캐온 것을 심어 키우는 식으로 운영합니다. 그러기에 온 산을 다 헤매고 돌아다녀야 하지요. 제가 향토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기 때문에 겸사겸사 곳곳에 다니면서 소득도 있었어요."

―무슨 소득인데요.

" 골짝골짝 다니다 보면 특징이 보여요. 노거수(老巨樹)의 유무에 따라 마을 풍광(風光)에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저 보호하는 게 좋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하다 독일을 방문했을 때 노거수의 진가를 알았습니다. 큰 나무 밑에 큰 인물이 난다는 것을요."

―큰 나무 밑에 큰 인물이 난다니요.

" 일반적으로 나무는 110살 때 베요. 독일은 230살 때 베더군요. 제가 '임학도 공부하지 않았느냐'고 농담하자 이러더군요. 아카시아가 많으면 아카시아 기질 닮고, 소나무가 많으면 소나무 기질을 닮는다고. 게르만 민족의 기질은 노거수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들은 아름드리나무를 '벤츠 카 트리'라고 불러요. 나무 한 그루 베면 벤츠 승용차 한 대 살 수 있는 돈이 돼요. 나무는 국력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그 말 듣고 제가 노거수회를 조직했지요."

―나무가 국력이라고요?

"예외는 있어요. 아름드리나무가 브라질에 제일 많은데 그럼 브라질이 세계 최고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요."

―저기 저쪽에 붙은 안내판에 현몽이란 말이 나오는데 뭡니까.

"아, 이 땅이 꼭 필요했는데 주인이 팔지 않았어요. 어느 날 꿈에 아버님이 보였어요. 그날 오후 주인이 땅 문서를 들고 오더군요. 부친이 현몽(現夢)하신 겁니다. 그걸 기념해 만들었어요."

■남은 10%를 향해

이 삼우는 기청산 식물원이 미완성이라고 했다. 100을 기준으로 80~90% 쯤 완성됐다는 것이다. 그는 식물원에 들르는 관람객들이 자연을 마음껏 맛본 뒤 커피 한잔을 즐기거나 자연식으로 끼니를 해결할 시설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적선(積善)'에 비유했다. 뭐가 적선이냐고 물었다. "의사들이 돈 많이 버는 게 적선을 했기 때문이지요. 남의 건강을 챙겨주잖아요. 저도 그렇지요."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우리 산천초목들이 그동안 빛을 못봤잖아요. 제가 이런 상상을 합니다. 그 녀석들이 지금은 내게 얼마나 고맙다고 절을 할까 하는."

―뜻은 좋아보이는데 식물원으로 돈 벌기는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기계는 굴삭기나 트럭 정도입니다. 나머지가 전부 인건비예요. 제가 그동안 고용 창출한 게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 때문에 부채에 시달린 적도 있지만요. 비법은 있어요."

―무슨 비법인데요.

"제가 열심히 하면 되지요. 새벽 3시에 일어나 낮 12시까지 일하고, 한두 시간 낮잠 자다가 다시 일합니다. 잠은 밤 12시쯤 자지요."

―농부는 무엇을 먹나요.

" 아침에는 생식과 과일 몇 조각, 점심에는 주로 두부나 된장찌개로 식사합니다. 저녁도 비슷하고요. 1주일에 한 번은 꼭 라면을 먹습니다. 신선도 라면은 먹어야 하잖아요. 이렇게 지내면 잔병이 없어요. 젊었을 때는 잔병치레도 꽤 했지만요."

―이런 곳에서 살면 신선이 됩니까?

"저쪽에 농막(農幕)이 있어요. 이곳에 들어올 때 지은 것이니 40년이 됐지요. 저녁 때 일 끝내고 석양 바라보며 막걸리 한잔 하면 신선이 안 부럽습니다."

―자연 앞에서 자꾸 돈 이야기 꺼내서 좀 그렇지만, 이런 넓은 땅을 가질 정도면 부동산 투자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제 집사람(오은령)이 포항에 저 몰래 집터 사놓았다가 제게 혼이 났어요. 그 즉시 팔아서 논을 사고 말았지요. 부동산도 히말라야 시다 같은 나무나 마찬가지예요. 속성을 노리는 거지요."

―요즘 아내에게 기 못 펴는 분들이 많은데 Why?에는 신기하게도 떵떵 큰소리치는 분들만 등장합니다.

"아내는 제가 농사짓는 데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 아내 나이는 쓰지 마세요. 나이 들어도 여자잖아요."

―자제들도 그렇습니까?

"아들은 서울에서 펀드매니저를 하고 있고 큰딸과 사위가 이곳에 있지요. 사위가 서울대 임학과 제 후배인데 식물원 안에 설립된 한국생태조경연구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6 시간 동안 기자는 식물원에서 홀로 호사를 누렸다. 갈증을 느꼈을 때 그는 남자에게 좋다며 식물원에서 만든 차를 권했다. 얼씨구나 거푸 잔을 비웠다. 어둠이 밀려올 무렵 상경하면서 그 효능이 이상한 쪽에서 발현됐다. 서울까지 오면서 들른 휴게소 숫자를 기억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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