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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8.05.09 12:53

눈의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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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혀



                                                                          이 월란





그녀는 내 모가지를 비틀더니 멱살을 잡곤
밑둥을 잘라 오물통에 미련없이 던졌다
이제 그녀처럼 좔좔 흐르는 수도꼭지 아래서 샤워를 한다
하루치의 발자국들이 밟아 묻혀 온 흙들이 씻겨져 나가며
흐르는 세월에 몸을 헹군다
늘 그랬듯이 그녀는 내 초록살 접힌 구석마다 손가락을 집어넣곤
고집과 독선의 숨겨진 모래알들을 샅샅이 훑어내어 물 속에 떠내려보낸다
그녀의 손에 들려지는 양념통들은 이미 그녀의 눈에 달린 혀가
익히 알고 있는 맛들이다. 일상의 모든 언행들이 그랬듯이
입의 혀로 맛을 볼 때까진 그녀도, 나도 눈대중으로 살고 있다
티스푼도, 테이블스푼도, 계량컵도 생이 잘려나가는 도마 위엔 놓여있지 않다
마딘 이성 몇 스푼에 0.9 %의 짠기가 스민 눈물 몇 방울이 헤프게 배합되기도
감성 몇 테이블스푼에 후회 몇 컵이 들이부어져 간능을 떨기도 한다
온몸에 찐득하게 달라붙을 배합된 양념들이 거북살스러울 땐
가식의 일회용 장갑을 끼고 나를 버무리기도 한다
참기름과 간장과 고춧가루와 마늘과 파로
지는 햇덩이를 버무리고, 가슴에 떨어지는 별들을 버무린다
그 날 눈에 밟힌 종적들을 모조리 움켜쥐고 조물조물 버무려
입 안에 쏙 넣어보면 때론 해낙낙한 미소가 함박꽃으로 피어날 때도
풀죽은 나팔꽃처럼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했었다
주로 엉뚱한 심상의 보풀들이 날아다니다 양념 속에 슬쩍 떨어지거나
마늘을 찧을 때 짜증스러웠던 잔사다리들이나 험언들을 같이 빻거나
파를 썰며 내 회한의 지점까지 끌어와 같이 쓱싹쓱싹 썰어버렸을 때
눈의 혀가 버무려놓은 온갓 맛들이 입 안으로 들어와 진실을 들이대어
혀가 화끈거리기도, 목구멍이 턱 막히기도, 입술이 타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렇게 씻어내고, 버무린 한 줌의 삶을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아 놓는다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곤 마지막으로 희망이라는 볶은 깨를 살살 뿌려두면
밋밋하게 숨 죽은 나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눈의 혀를, 입의 혀를
제대로 유혹하여 질펀하게 죽은 세월은 내일 또 폴폴 살아나게 될 테니까

                                                          
                                                                            200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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