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118
어제:
206
전체:
5,030,633

이달의 작가
2008.05.10 08:57

마(魔)의 정체구간

조회 수 280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魔)의 정체구간


                                                                                                                                                            이 월란




기억의 길 가에 서 있던 소(牛)들은 늘 먹은 것을 게워 내어 되씹고 있다.


하루는 예정된 빛을 향해, 하루는 예정된 어둠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려가도록 나를 부축해 온 것들이 있다. 누군가 떠나 버린, 마른버짐처럼 허옇게 탈색되어 버린 땅 위에서도 혈색 좋게 돋아나 꽃을 피우던 일상의 욕기들. 어느 날은 철제 버팀목같이 든든해 웃음 주었던, 어느 날은 타넘어야 할 가시 돋힌 철창되어 가로막던 인연의 사슬들. 곰삭인 신열이 발음도 거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올 때쯤, 돌아보면 어둠의 옷들이 입혀지고 마는 정체구간이 있다. 후퇴도 전진도 아닌 내 안으로 들어가 고스란히 머무는 시간.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아 왔다는, 떨어뜨리고 지나쳐 온 그 무엇인가를 가지러 가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다 보면 어둠의 옷이 입혀지고 있다. 허물어지던 골목길이, 두 팔 벌린 가로수가, 고개 쳐든 꽃들이 솔기 하나 튿어지는 소리 없이 어둠의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밤의 세공사가 소리 없이 조각해 내는 어둠의 꽃들. 내게 만져지는 것들은 왜 모두 슬픔으로 변해버리나. 생애의 끄트머리는 언제나 슬픔이라고.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맡고, 만졌던 것들이 몸의 미로를 거쳐 배설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철퍼덕 주저 앉아 버린 것들, 게워 내고 되씹어 뱉어 내야 하는 것들, 반추되지도 못하는 굼뜬 통증이 두려워 묻어 둔, 페스트같은 열병의 자국도, 죄 앞에 노예의 근성으로 밖에 설 수 없었던 순간들도 바람에 스미듯 어둠의 옷으로 갈아 입는 정체구간, 백태 낀 심경에 태열의 흔적마저 말끔히 지우고 난, 기억의 통로에 가끔씩 서서 타액 묻은 턱주가리를 우물거리던 그 소의 멍하고도 신비한 눈빛을 닮고 싶다.
                                                                                                                                                         2007-09-11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31 견공 시리즈 비밀 2(견공시리즈 26) 이월란 2009.09.16 286
930 비밀 이월란 2009.03.21 263
929 비말감염 이월란 2010.08.22 597
928 비렁뱅이 어사또 이월란 2009.06.10 531
927 비꽃 이월란 2008.05.09 475
926 브레인스토밍 이월란 2010.02.12 324
925 붉은 전사 이월란 2010.06.12 457
924 제2시집 붉은 남자 이월란 2008.07.04 352
923 붉어져가는 기억들 이월란 2008.05.10 294
922 불치병 이월란 2008.05.08 310
921 불씨 이월란 2008.05.10 263
920 불시착 이월란 2009.01.22 265
919 불면증 이월란 2014.06.14 310
918 불망(不忘) 이월란 2008.05.08 373
917 견공 시리즈 불륜(견공시리즈 14) 이월란 2009.08.25 307
916 제1시집 불꽃놀이 이월란 2008.05.09 265
915 불가사의(不可思議) 이월란 2008.05.08 355
914 제2시집 분신 이월란 2008.08.13 217
913 분수(分水) 이월란 2008.05.10 254
912 부활 1 이월란 2016.09.08 145
Board Pagination Prev 1 ...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