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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8.05.10 08:57

마(魔)의 정체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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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魔)의 정체구간


                                                                                                                                                            이 월란




기억의 길 가에 서 있던 소(牛)들은 늘 먹은 것을 게워 내어 되씹고 있다.


하루는 예정된 빛을 향해, 하루는 예정된 어둠을 향해 주저 없이 달려가도록 나를 부축해 온 것들이 있다. 누군가 떠나 버린, 마른버짐처럼 허옇게 탈색되어 버린 땅 위에서도 혈색 좋게 돋아나 꽃을 피우던 일상의 욕기들. 어느 날은 철제 버팀목같이 든든해 웃음 주었던, 어느 날은 타넘어야 할 가시 돋힌 철창되어 가로막던 인연의 사슬들. 곰삭인 신열이 발음도 거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올 때쯤, 돌아보면 어둠의 옷들이 입혀지고 마는 정체구간이 있다. 후퇴도 전진도 아닌 내 안으로 들어가 고스란히 머무는 시간.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아 왔다는, 떨어뜨리고 지나쳐 온 그 무엇인가를 가지러 가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다 보면 어둠의 옷이 입혀지고 있다. 허물어지던 골목길이, 두 팔 벌린 가로수가, 고개 쳐든 꽃들이 솔기 하나 튿어지는 소리 없이 어둠의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밤의 세공사가 소리 없이 조각해 내는 어둠의 꽃들. 내게 만져지는 것들은 왜 모두 슬픔으로 변해버리나. 생애의 끄트머리는 언제나 슬픔이라고.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맡고, 만졌던 것들이 몸의 미로를 거쳐 배설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철퍼덕 주저 앉아 버린 것들, 게워 내고 되씹어 뱉어 내야 하는 것들, 반추되지도 못하는 굼뜬 통증이 두려워 묻어 둔, 페스트같은 열병의 자국도, 죄 앞에 노예의 근성으로 밖에 설 수 없었던 순간들도 바람에 스미듯 어둠의 옷으로 갈아 입는 정체구간, 백태 낀 심경에 태열의 흔적마저 말끔히 지우고 난, 기억의 통로에 가끔씩 서서 타액 묻은 턱주가리를 우물거리던 그 소의 멍하고도 신비한 눈빛을 닮고 싶다.
                                                                                                                                                         200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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