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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2시집
2008.05.21 14:06

고요를 물고 날아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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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물고 날아간 새



                                                                              이 월란




뒤뜰로 난 크낙한 창, 한 줌의 시간은 블라인드 사이로 겨울나무 가지마다 초록 발자국을 남기고 떠났다. 세월이 남기고 간 내 몸의 흔적도 저 블라인드 사이로 죄다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진실의 깊이를 짚어내진 못한다. 대지는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데 상식은 늘 물 위에 떠 있다. 두 발 꼿꼿이 정박해 있는 섬이어야 했다. 수위에 따라 오르내리며 어지럽게 출렁이다 표류하는 난파선. 난 헤엄을 칠 줄 모른다. 바람은 미쳐가고 있다.


어제는 저 창 가득 회오리가 머리채를 흔들었고 오늘은 터질 듯 고요하다, 적막하다. 풍력 계급 0의 바람이 없는 상태.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초속 0.0~0.2미터이며 육지에서는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고 바다에서는 수면이 잔잔하다는 그 고요. 들꽃의 정수리 위에 떨어뜨린 저 한 점의 고요로도 세상은 맑아지리라 꿈꾸던 내 어린 날은 새끼 손가락 한 마디쯤으로 몸 끝에 달려 있다. 새벽 지평선 위에 로드킬 당한, 어둠의 애무에 가랑이를 벌린 순진무구한 사체가 간간이 눈에 띈다.


껍질 없는 영혼이 나신으로 뒹군다. 꿈틀대는 서로의 내장을 초음파 사진처럼 들여다 보아야 하는, 산다는 건 끔찍하다. 아직도 시퍼렇게 뛰고 있는 심장을 상설시장의 좌판 위에 내다 놓은 저 작부같은 세상은 이 아침에도 낯뜨겁게 격렬하다. 오늘도 육신을 광대 삼아 고통을 연출한다. 해가 지면 나를 팔아 너를 사고, 해가 뜨면 너를 팔아 나를 산다.


새 한 마리 화살처럼 날아온다. 심란하도록 작은 몸으로 나무의 심장을 향해 통통 걸어가더니 고요를 한 점 입에 물곤 왔던 길을 정확히 지우며 날아간다. 저 창 밖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사방이 투명한 영혼의 집, 창이 너무 넓다.

                                                                                200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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