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바람 좀 피우고 올께
이 월란
내 가슴 향해 조막손을 벌리던 꼬맹이 아들, 이제 다 커버려
내 머리 위에서 능글능글, 징글징글
밥숟가락 참새처럼 받아먹던 그 시절
집에 오면 한국말, 탁아소에선 영어
여물지도 못한 머리 굴려 겨우 말문이 트였을 때
큰 잘못 저지르고 회초리 든 엄마의 고함소리
<다신 안그러겠다고 대답해, 빨리 대답 안해?>
잔뜩 겁에 질린 두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 겨우 내뱉은 말
<흑흑흑 “대답” 흑흑흑흑>
눈 내리던 겨울 밤, 모자도 입고, 양말도 입고, 신발도 입고
부자(父子)가 나란히 나가던, 뒤뚱거리는 모국어의 오리걸음을 보며
한국어를 엉터리로 하면 귀여운데 영어를 엉터리로 하면 왜 무식하게만 보였을까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뼛속까지 파고든 문화적 사대주의의 잔재였을까
이방의 땅으로 분재되어 운명의 디아스포라가 된 이민 1세들은 먹고 살기에 바빴고
1.5세들은 김치냄새 말끔히 씻어내고 혀를 잘 굴리는 것만이
원시적인 아이들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출구였을 터
예민했던 목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붙었다 떨어졌다 했을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말 안쓰고 살다가 마누라 잘만나 일취월장 한국어 실력이 오른
신혼 초의 그 남자, 평강공주 앞에 선 바보온달처럼
냉정한 대화에 길들여진 사람과 성급한 분노에 먼저 길들여진 사람과의
자못 심각했던, 처음으로 치러낸 부부싸움 도중
타임아웃을 요구하며 심각한 모습으로 문을 나서며 했던 말
<나, 바람 좀 피우고 올께>
전쟁 다음 날 아침, 화해의 신선한 무드를 유지하려
꽤병을 부리며 하는 말
<나, 몸통 났어>
<몸통이 뭔데?>
<왜 있잖아--유식한 척하며--두통, 복통, 치통..........몸통 말야>
나의 과거를 둘이서 작당을 하고 훔쳐선
똑같이 갈라먹었는지 지금은 키도, 목소리도 똑같아져 버린
나의 모습이 동공 속에 늘 거꾸로 박혀 있는
합법적인 한 쌍의 사랑호운* 나의 도적떼
2008-03-15
* 사랑홉다 : ‘사랑옵다’의 원말,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