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236
어제:
353
전체:
5,022,843

이달의 작가
제2시집
2008.06.03 13:29

김칫독을 씻으며

조회 수 228 추천 수 2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칫독을 씻으며



                                                                이 월란



김치 다섯 포기가 들어 있던 항아리를 비웠다
두 손으로도 겨우 들었던 것을 한 손으로 휘휘 돌리며
피딱지처럼 말라 붙은 양념들을 말끔히 씻어 내었다
투명한 유리 항아리가 거대한 보석같다
씻겨진다는 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가벼워진다는 건 다 내려 놓았다는 것이고
비워진다는 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투명한 것을 씻을 때마다 묘한 희열을 맛본다
마지막 헹굼 단계에선 필요이상으로 속도가 느려진다
하찮은 노력으로 무엇인가가 맑아지고 투명해진다는 건
신선한 기쁨이다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은 사량(思量) 없는 얼굴에
번개같은 빛이 여기저기서 뛰어 들어온다
감금되어 있던 비릿한 넋이 소통을 시작하고
원시의 체온을 되찾아 완벽한 조율이 끝났다
험로를 헤치고 달려와 마침내 정박한 배의 맑은 창 같다
모노톤으로 만발한 유리꽃 사이로 운신하는 공기알
물꽃 세례를 받은 허공이 날을 세워 독안으로 들어온다
무엇이라도 베겠다, 무엇이라도 삼키겠다
비우고도 충만해지는 세공된 허공의 모순
기억의 생가를 허물고
응축된 生의 즙액이 만장 아래 흩어지는 날
매콤히 눈물지었던, 새콤히 가슴 시렸던 나의 몸도
씻겨지고, 비워지고, 가벼워 지는 날, 이리 투명해질까
다 비워내고도 충만해져 이리 눈부셔올까
서로를 다 파먹고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어
삭발한 고요 아래 적막히 앉아
극한의 가슴도 빈독처럼
무루(無漏)의 향기로 마저 여물까

                                                            2008-06-03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651 히키코모리 이월란 2011.03.18 396
1650 흰긴수염고래 이월란 2010.01.04 545
1649 흙비 이월란 2010.03.22 523
1648 흔적 이월란 2008.08.28 282
1647 흔들의자 이월란 2008.05.08 559
1646 제2시집 흔들리는집 / 서문 (오세영) file 이월란 2016.08.15 115
1645 제3시집 흔들리는 집 6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 이월란 2008.11.12 497
1644 흔들리는 집 5 이월란 2008.11.12 273
1643 흔들리는 집 4 이월란 2008.11.11 285
1642 제2시집 흔들리는 집 3 이월란 2008.06.16 201
1641 흔들리는 집 2 이월란 2008.05.10 270
1640 제2시집 흔들리는 집 / 해설 (임헌영) file 이월란 2016.08.15 168
1639 제2시집 흔들리는 집 / 표4글, 시인의 말 file 이월란 2016.08.15 164
1638 제2시집 흔들리는 집 이월란 2008.05.10 694
1637 흔들리는 물동이 이월란 2008.05.09 277
1636 흑염소탕 이월란 2009.10.08 661
1635 흐림의 실체 이월란 2008.10.24 263
1634 제3시집 흐린 날의 프리웨이 이월란 2009.09.04 378
1633 흐린 날의 악보 이월란 2021.08.16 58
1632 흐린 날 이월란 2008.05.10 29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