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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8.06.08 13:20

둥둥 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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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 북소리



                                                                              이 월란




과일을 사서 뒷 트렁크에 실었다. 수박, 딸기상자, 달랑 두 가지를 텅 빈 트렁크 구석에 가지런히 싣고 달렸다. 좌회전, 우회전을 할 때마다 차 옆구리가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볼링볼같은 둔중한 부딪침이 내 몸까지 쿵쿵 때렸다. 저 수박통이 왜 저렇게 요동을 치지? 수박통이 굴러봐야 트렁크 안이지, 평소대로 마음껏 밟았다 놓았다 그렇게 신나게 집으로 왔다.


트렁크를 여는 순간 처참한 광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플라스틱 딸기상자의 똑딱이 단추가 일찌감치 열렸던지 딸기 예닐곱개가 트렁크 바닥에서 즉석 딸기잼이 되어 있었고 수박은 몸통 여기저기 묻어있는 딸기잼을 핥으며 당구대 위의 신나는 쾌주를 아직도 잊지 못한 듯 헉헉대고 있었다. 딸기상자는 살육당한 마을처럼 황량했다.


수박은 출발할 때의 첫 샷으로 딸기상자의 옆구리를 강타했는지, 나의 거침없는 질주로 튀어나온 딸기를 향해 계란 앞에 구르는 바위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그렇게 으깨어지고 있었다. 평소에 무지하게 밟아대는 삶의 페달에 무엇인가 부딪쳐 굴러다니며 둥둥 양심의 북을 울리고 있었다. 내가 정해둔 삶의 우선순위는 때로 얼마나 끔찍하도록 무지한 선택인지. 난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고 점검했어야 했다. 아니, 처음부터 수박을 고정시켜 두었어야 했다.


볼 수 없는 영역이라는 당당한 구실 아래 어떤 중요한 것들을 이리저리 내돌리며 질주하는 양심의 무법천지, 영혼을 둥둥 치는 북소리 자주 들렸었다. 한 뼘만 파고들어도 훤히 드러나는 절대자의 손길, 간단히 뿌리쳐 왔었다. 저 딸기처럼 처참히 문드러지고 있는 영혼의 여린 곳들이 방관자의 핸들 뒤에서 으깨어지고 있었다. 무심히 잡은 삶의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며 페달을 밟을 때마다 텅빈 마음 안에서 굴러다니는 수박통같은 욕망들.


둥둥 북소리, 꿈결처럼 들려온다. 무심히 페달을 밟고 있다.

                                                                          200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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