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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2시집
2008.07.04 05:04

붉은 남자

조회 수 352 추천 수 1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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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남자 ---------------------- Red Man*


                                                                                          이 월란




땅이 사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속한다는 뜨거운 신앙을 품고
사막 위에 낮게 엎드린 움막을 닮아 있는 저 비운의 민족
무지개 속에서 불과 물을 갈라내어 피륙을 짜고
햇빛과 물방울을 섞어 구슬처럼 목에 걸고 다니던 체로키* 인디언
평원 위에 살아 숨쉬는 혼백을 두고 불모지의 늪으로 밀려난 대지의 주인


해가 뜨고 지는 것이 그저 거룩하여 하루하루가 다 거룩했고
엎드린 신생아들처럼 대지에 엎드려 어미의 심장 소리를 듣던 구릿빛 꿈
바람을 벽삼아 햇볕을 지붕 삼아 태어난 그들의 성스러운 천국은
이제 생존을 위한 보호구역인가 멸족을 앞당기는 유폐지역인가
유약한 생존의 욕구가 땅을 빼앗은 자들의 마지막 양심 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


저 파웰 호수의 기암괴석 어디를 돌아도 눈밑에 삼색 페인트 칠을 하고
머리에 깃털을 꽂은 그들이 말고삐를 잡고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히히힝 나타날 것만 같은데
항복의 백기를 올리기까지 피비린내 나는 망령의 춤을 그치지 않았던
그들의 절규는 승자가 쓰는 역사 속에서 한갓 사라져가는 본토의 전설


사냥을 해야 할 굵은 팔뚝은 관광객들을 위해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끝없는 대초원 위에서 말을 달려야 할 두 발은 투어 가이드가 되어 있다
잘린 혀뿌리는 더 이상 아버지의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접목당한 잉글리쉬 꽃을 붉게 붉게 피우며 야생의 혈관 가득 백인의 피를 수혈하고
금렵 사인이 붙은 한적한 사냥터같은 보호구역에서 오늘도 곱게 사육 당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어떻게 사고 파나요?
맨해튼 섬을 24불 가치의 장신구에 팔아넘겼다는, 포커한터스같은 추장의 딸은
구획받은 한뙈기 땅 위에서 오늘도 허기진 관광객을 위해 파스타를 나르고 있다
울타리를 몰랐던 그들의 발가벗은 순수는 보이지 않는 자물쇠가 되어
그들이 발을 담그던 시냇물의 반짝임을 흉내낸 네온등으로 담장이 쌓이고
살아서도 자랑스럽고 죽어서도 영광스러울 그들, 살육당한 전설의 피가
그랜드캐년의 끝자락을 오늘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개스 스테이션 한모퉁이에 투어팀들을 세워 놓고 완벽한 영어로 설명을 하고 있는
엉덩이를 까보면 푸른 몽고반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도 같은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저 붉은 남자, 푹푹 찌는 이 더위에
털실로 짠 빵모자를 쓰고 있다, 멸족당한 조상의 얼이 선명히 새겨진 뇌파 속으로
흐르는 생소한 문명의 바람은 오랜 세월의 폭염 속에서도 저리 시린 것일까

                                                                                        2008-07-04



* Powell 호수와 Glen Canyon Dam 이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인 Arizona 주,
  Page City를 다녀와서....(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보호구역 속에
  강금되어 있는 원주민들의 독립을 생각하며)  

* Red Man : Red Indian, Cherokee 族, 북아메리카 원주민(reds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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