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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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8.10.07 14:23

횟집 어항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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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집 어항 속에서



                                                                                                                          이월란




횟집 들목마다 어항들이 놓여 있어요.

  
사각이나 동그라미로 절단된 인조바다 속, 일상의 터닝포인트가 때론 90도 때론 180도인 좁아터진 순간마다 멀미방지용 패치를 사러다니진 않죠. 축소된 동선 끝에 머릴 찧지도 않아요. 전어 몇 마리 투망 속에 걸리고 펄떡이는 새우들도 마른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지듯 우리도 그렇게 걸리고 놓여지면 ‘축하합니다’ 대신 ‘안녕히 가세요’로 축의금의 ‘祝’자만 ‘弔’자로 바꾸지 않던가요.


다비소에서 건져낸 전어구이처럼 나의 뼈도 바삭바삭 고소한 소리로 마감 될까요. 어항 건너편, 노랑포수같은 붉은 입술의 주인여자가 헤아리는 지폐 사이로 헤엄쳐 들어간 물고기 몇 마리 다신 나오지 않네요. 목숨이 거래 당한지는 오래 되었잖아요. 신선도는 오래된 사치항목이에요. 수컷들은 암컷들의 꽁무니를 놓치지 않아요. 아이들은 지상에 발내린 스카이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밤새워 문제집을 풀어요. 물고기들은 눈을 뜨고 잔대죠. 밤새 늙어가는 지느러미를 세우고 어둠의 안약을 똑똑 떨어뜨리며 반들반들 눈알을 닦죠. 아침의 빈자리가 결코 낯설지 않도록 말이에요.

  
어항은 집이 아니에요. 영원히 열려 있어야 하는 거대한 창이죠. 한숨마저 뽀글뽀글 기포여행을 시작하면 기억색도 어항빛에 따라 달라지죠. 미완의 결말에 순종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마감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를 포식하죠. (‘놀라지 말고 즐겨라’--오늘의 인터넷 오픈페이지 공지였어요.) 공원묘지가 아름다운건 마감시간을 모르기 때문이죠. 비장한 각오는 하루하루 수초처럼 풀어지구요. 어린 물고기들의 싱싱한 헤엄치기는 차라리 횡설수설이에요.


어항만한 그물이 드리울 때마다 사고다발지역의 미미한 접촉사고처럼 또 몇 마리 사라지죠. 물속은 그리 적막하지 않아요. 마음 속보다 차라리 투명하니까요. 사방이 막혔어도 하늘은 뚫려 있건만 지느러미는 날개로 진화되지 못했어요. 흔적 없는 물속에 온갖 인연을 묻어 두어도 어느 틈에나 스며들고 곧 충만해지는 수맥의 골짜기는 그래도 자유로운가요. 뼈저림은 항시 불어터져, 물컹물컹 오래 견디지 못한답니다. 머리론 길을 내고 꼬리론 지워가는 기막힌 수로를 어느 누구도 재생해 낼 순 없죠.


허전함의 빈의자가 둥둥 수면 위로 떠올라요. 폐허가 뭉게뭉게 버꿈을 물고 떠올라요. 물속에도 벼랑이 있나 봐요. 배를 뒤집고 벌렁 드러누운 영원의 바닥이 가끔 보이잖아요. 신선함을 가장한 저 처절한 질주는 생수와 폐수의 혼음에 길들여져 배설구와 입이 한구멍인 홑세포 동물로 퇴행하고 있어요. 둥근 달빛이 사각의 어항 속으로 또 헤엄쳐 들어가고 있네요.                                                                        

                                                                                                                                                                             2008-10-07



* 스카이 대학 : S,K,Y의 3대 일류대학을 지칭하는 한국의 유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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