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공식

by 이월란 posted Nov 0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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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공식


                                                                                                   이월란



내가 글을 몰랐을 때 언닌, 땅거미처럼 바싹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지
난 나름대로 짐작했어, 언닌 대체 뭘 쓰고 있나


책 속의 ○는 전혀 ○가 아니었고
책 속의 □는 전혀 □가 아니었고
책 속의 ㅣ는 비오는 날 지렁이처럼 꿈틀댔고
책 속의 ㅡ는 아버지가 둘러엎은 밥상처럼 한쪽이 내려 앉았었지


입술을 연필심처럼 뾰족이 내밀어 허공에도 똑같은 글씨를 쓰고 있는 언니의 입술을 보며 생각했어. 학교처럼 위대한 곳에서 저리 단순한 베끼길 숙제로 내줄린 없다구. 어떤 기막힌 공식에 의해 번역되고 있는게 틀림 없다구.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야무지게 귓불 뒤로 붙이고, 두 입술에 한번 힘을 주고, 코를 한번 훌쩍 들이마시곤 다시 허공에도, 칸잡힌 공책에도, 삐뚤빼뚤 진기한 공식으로 번역하고 있는 언닌 정말 위대해 보였지. 난 그 공식을 꼭 알아내고야 말리라, 2년을 벼르고 별렀지. 놀랍게도 그 공식은 아주 아주 간단했어. <다섯 번씩 써 오세요>


참으로 간단하지. 어젠 비가 왔고, 오늘은 눈이 올거라는 날씨정보처럼. 어젠 너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눈속말하더니 오늘은 미안하다며 사라지는 것처럼. 엄마 내 걱정은 제발 하지 마세요, 난 바보가 아니에요. 하던 아이가 바보처럼 마리화나를 피우고 들어오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일들이 다섯 번씩, 아니 쉰 번씩, 아니 오백 번씩 되풀이 된다는 거야.


○는 전혀 ○같지 않은 ○야
□는 전혀 □같지 않은 □야
ㅣ도 전혀 ㅣ같지 않은 ㅣ야
ㅡ도 전혀 ㅡ같지 않은 ㅡ야
  

○와 □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여장남자가 하루아침에 여자가 될 순 없는 것처럼 같은 공식으로 착각하면 큰 오산이야. 알 수 없는 곳에서 내리는 수억만 개의 눈송이들이 모두 다른 육각형의 결정체라는 공식 같은거야. 실낙원의 늪에 빠진 밀납인형보다도 못한 주제에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엎드리지 못한 욥*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복고풍의 그 이론은 반짝, 장식으로 달아두고라도 나를 변명하기에만 바쁜 그런 신비한 공식 같은거지. 신출귀몰해. 피카디리 소극장의 무협영화같은 기상천외한 공식으로 날마다 새끼를 치지.


이젠 상관 없게 되었어. 어젯밤 그들은 같은 밤을 갈라먹곤 오늘 ○속에 □가 있으니깐. 어젯밤 그들은 흡혈귀처럼 피를 나누어 빨아 마시곤 □속에 ○가 있으니깐.

                                                                                               2008-11-06




* 욥(Job) : ꃃ〖기독교〗 구약 성경 <욥기>의 주인공. 가혹한 시련을 견디어 내고 믿음을 굳게 지킨 인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