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288
어제:
288
전체:
5,021,939

이달의 작가
2008.11.06 10:46

신비로운 공식

조회 수 217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신비한 공식


                                                                                                   이월란



내가 글을 몰랐을 때 언닌, 땅거미처럼 바싹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지
난 나름대로 짐작했어, 언닌 대체 뭘 쓰고 있나


책 속의 ○는 전혀 ○가 아니었고
책 속의 □는 전혀 □가 아니었고
책 속의 ㅣ는 비오는 날 지렁이처럼 꿈틀댔고
책 속의 ㅡ는 아버지가 둘러엎은 밥상처럼 한쪽이 내려 앉았었지


입술을 연필심처럼 뾰족이 내밀어 허공에도 똑같은 글씨를 쓰고 있는 언니의 입술을 보며 생각했어. 학교처럼 위대한 곳에서 저리 단순한 베끼길 숙제로 내줄린 없다구. 어떤 기막힌 공식에 의해 번역되고 있는게 틀림 없다구.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야무지게 귓불 뒤로 붙이고, 두 입술에 한번 힘을 주고, 코를 한번 훌쩍 들이마시곤 다시 허공에도, 칸잡힌 공책에도, 삐뚤빼뚤 진기한 공식으로 번역하고 있는 언닌 정말 위대해 보였지. 난 그 공식을 꼭 알아내고야 말리라, 2년을 벼르고 별렀지. 놀랍게도 그 공식은 아주 아주 간단했어. <다섯 번씩 써 오세요>


참으로 간단하지. 어젠 비가 왔고, 오늘은 눈이 올거라는 날씨정보처럼. 어젠 너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눈속말하더니 오늘은 미안하다며 사라지는 것처럼. 엄마 내 걱정은 제발 하지 마세요, 난 바보가 아니에요. 하던 아이가 바보처럼 마리화나를 피우고 들어오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일들이 다섯 번씩, 아니 쉰 번씩, 아니 오백 번씩 되풀이 된다는 거야.


○는 전혀 ○같지 않은 ○야
□는 전혀 □같지 않은 □야
ㅣ도 전혀 ㅣ같지 않은 ㅣ야
ㅡ도 전혀 ㅡ같지 않은 ㅡ야
  

○와 □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여장남자가 하루아침에 여자가 될 순 없는 것처럼 같은 공식으로 착각하면 큰 오산이야. 알 수 없는 곳에서 내리는 수억만 개의 눈송이들이 모두 다른 육각형의 결정체라는 공식 같은거야. 실낙원의 늪에 빠진 밀납인형보다도 못한 주제에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엎드리지 못한 욥*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복고풍의 그 이론은 반짝, 장식으로 달아두고라도 나를 변명하기에만 바쁜 그런 신비한 공식 같은거지. 신출귀몰해. 피카디리 소극장의 무협영화같은 기상천외한 공식으로 날마다 새끼를 치지.


이젠 상관 없게 되었어. 어젯밤 그들은 같은 밤을 갈라먹곤 오늘 ○속에 □가 있으니깐. 어젯밤 그들은 흡혈귀처럼 피를 나누어 빨아 마시곤 □속에 ○가 있으니깐.

                                                                                               2008-11-06




* 욥(Job) : ꃃ〖기독교〗 구약 성경 <욥기>의 주인공. 가혹한 시련을 견디어 내고 믿음을 굳게 지킨 인물로 알려졌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신비로운 공식 이월란 2008.11.06 217
1110 식상해질 때도 된, 하지만 내겐 더욱 절실해지기만 하는 오늘도 이월란 2008.05.10 301
1109 식물인간 이월란 2013.05.24 335
1108 식기 세척기 이월란 2010.06.12 435
1107 시한부 이월란 2009.09.04 338
1106 시체놀이 이월란 2011.05.31 326
1105 시차(時差) 이월란 2008.05.10 323
1104 시집살이 이월란 2009.04.05 274
1103 시제(時制) 없음 이월란 2009.05.04 282
1102 시작노트 이월란 2009.08.01 413
1101 시야(視野) 이월란 2008.09.04 246
1100 시스루룩(see through look)의 유물 이월란 2009.07.27 390
1099 견공 시리즈 시선(견공시리즈 75) 이월란 2010.06.28 418
1098 시를 먹고 사는 짐승 이월란 2009.08.13 331
1097 제1시집 시나위 이월란 2008.05.09 388
1096 시가 말을 건다 이월란 2009.05.12 397
1095 시가 내게 오셨다 이월란 2009.08.13 441
1094 슬픔의 궤 이월란 2009.06.01 402
1093 견공 시리즈 슬픈 유추(견공시리즈 105) 이월란 2011.05.31 316
1092 스페이스 펜(Space Pen) 이월란 2008.05.10 326
Board Pagination Prev 1 ...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