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13 14:26

걸어오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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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오는 사진


                                                             이월란



오래된 앨범 첫 장엔 젊은 엄마가 웃고 있다
살아서 웃고 있는 나보다 젊은 엄마
네 명의 아이들이 양쪽으로 둘 씩 나란히 손을 잡고
전생의 꿈처럼 걸어오고 있다
귀밑 3cm의 단발머리에 교복을 단정히 입은 큰언니
체크 반바지 아래로 짧은 종아리가 슬픈 남동생까지
피에로같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나는
얼굴이 닳아빠져 내가 버린 오래된 인형같다


시내버스 털털대며 만세교를 지나고 승가람 지나
당도했을 직지사, 비로전 앞마당쯤 되었을라나
주말 관광지에서 사진사로 마주친 낯익은 동네아저씨
작은 돌멩이 하나를 앞에 던져두고, 요기까지 걸어오세요


열 손가락 챙챙 묶어 물들이던
봉숭아꽃 곱게 빻던 그 돌멩이처럼
지평선 아래 가라앉은 햇등이 되고 말았어도
엄마보다 늙어버린 어린가족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비밀도 많았던 우리집, 가장 비밀스럽지 않았던 순간이
앨범을 펼칠 때마다 폭로되고 누설되어도
손잡고 걸어오는 미소들만 물살처럼 환히 번지는데


바람둥이 아버지는 어디 가셨을까
꽃대마다 지쳐 휘어진 엄마의 꽃무늬 원피스는
아직도 꽃가루 분분이 날리는데
자, 요기까지 걸어오세요, 어머니, 나의 어머니
해탈한 웃음으로, 열반에 든 신비한 걸음으로
몇 장의 사진같은 生을 넘어 오세요
환히 걸어 오세요
저 돌멩이처럼 작은, 붉은 꽃물 배여 더욱 가까워진
生과 死의 경계를 건너 오세요


찰카닥!

                                                            200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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