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긋기

by 이월란 posted Jan 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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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긋기


                                                                       이월란

  


탯줄로 연명하고 탯줄 따라 딸려나온 나는 줄긋기를 좋아했다
줄이 보이면 잡고 싶었고 또 따라가고 싶었다
어릴 땐 교실 나무책상 중간을 칼로 휙 그었었고
운동장에선 맨땅을 긋고 또 그으며 땅따먹기에 정신을 팔았으며
한길에선 줄 따라 앙감질로 해가 푹푹 질 때까지 깨금집기를 했다
그렇게 분리를 일삼았고 경계를 즐겼다
줄은 칸을 만들고 네모진 칸들은 나를 가두었다
금 밟으면 쫓겨나는 열전의 유막, 벗어나거나 옮겨야만 했다
한 쪽 벽에 줄을 긋고 문을 내면 종종 밖에서 잠겨 있기도 했다
버릇처럼 줄을 긋고 나를 감는다
줄을 긋다보니 줄을 서는데도, 줄을 세우는데도 익숙해져 버렸다
줄은 수평선처럼 잔잔한데 내 몸은 출렁이며 어지럽다
결코 누군가를 향해 조준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마주서서 잡아당기는 줄은 팽팽한 칼날이 되어
나를 자르기도 한다
결코 눈금을 새기지도 말아야 한다
종이쪼가리나 전광판에 새겨진 무서운 숫자들은
종종 완전범죄의 모살자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모눈종이처럼 모눈이 많이 새겨진 칸들은
나를 해부하기 딱 좋은 수술칸이 되기도 했다
절개는 늘 출혈을 부른다
줄이 많고 그래서 칸도 많아진 원고지 위에서
칸마다 점점이 나를 흘려 두기 시작한 것도
이 줄긋기의 악습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허망한 세상의 줄들을 가늠하는 넓은 한 쪽 창틈에서
동네 아이 하나 줄을 비집고 나오고 있다
무심한 작대기를 땅에 질질 끌며 가고 있다
나는 또 익숙하게 딸려 간다

                                                              2009-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