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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3시집
2009.01.22 12:56

안개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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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정국


                                                                                                                이월란



1.

달렸어요. 하이빔이 자르는 안개의 심장은 쌀미음처럼 희멀건 색이었어요. 코앞의 시간만을 탕진하며 사는 나를 정확히 재현해내고 있었구요. 후진국의 하늘처럼 내려앉은 젖은 발에 마른 입술을 대고 한 뼘씩 해갈을 도모해 보았죠. 환속한 구름의 거푸집이 되어 푸석한 머리칼을 죄다 삭발해버리고도 당도해야할 목적지는 안개의 발끝처럼 멀었고 이정표는 일년초처럼 피었다 졌어요. 삼손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고 근육이완제가 뿌려진 안개의 근육은 수술 중 각성 같은 통증을 흘리면서도 몇 개의 강을 건너 왔네요. 푸른 신호등 지나 영원한 기갈의 천형을 받은 시구문을 지나고 있어요. 불막으로 들어가는 시신처럼 뜨거워진 목덜미에 서늘히 감긴 새벽을 걷어내면 비틀비틀 걸식한 빛을 토해내는 하늘 길 가득, 아무도 안개의 이름을 말하지 않죠. 먼말 불러와 시쳇말로 쏟아놓던, 먼동처럼 떴다 사라진 당신마저 안개였으므로.


2.

포복한 무중력의 늪으로 밀물지는 넋의 냄새. 원근법 사라진 안개의 뼈대를 굽이쳐 반투명한 떠돌이 입자가 되었어요. 철없이 눈비비던 애간장, 백태 낀 눈동자의 떼거지들을 지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신음은 칙칙폭폭 질주하는 청명한 기적 소리와도 같아요. 질주는 위험하죠. 족쇄 찬 수인처럼 엉금엉금 기어오세요. 안개나라의 법칙대로 싸늘한 레일을 낱낱이 밟으며 오세요. 건너뛰기조차 허용치 못하는 안개군단에 경의를 표하고 무릎은 제대로 꿇어야죠. 훗날 길목으로 트인 그 곳에 살가운 꽃이 피더라도 한번 지나온 우린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에요. 한 순간의 수렁이 평생의 무대가 되어도 서로의 안부를 충실히 전해야 하는, 잘 길들여진 神의 애완동물, 꿈의 자일에 목을 매단 즐거운 알피니스트에요. 절대 내려다보진 마세요. 높이를 가늠하지도 마세요. 안개의 깊이를 밟아낼 순 없어요. 서로의 입자처럼 부유하는 우리는.


3.

자꾸만 뻔뻔해지는 이 눈부신 신앙으로 안개나라를 평정해야 하니까요. 오늘도 죄 발린 아이 하나 안개 속에 파묻어 놓았다고 제발 실토하지 마세요. 나의 입은 비루한 용서가 침샘처럼 솟고 있는 면죄의 온상이에요. 절망도 너무 고상하죠. 유창한 혀 놀림의 파고 너머 구원의 방주가 에버랜드처럼 출렁이네요. 재밌죠. 이제 시작이니까요. 아주 유사한 복사본들이 넘쳐나는 항간의 빛나는 포도, 꼴깍 숨넘어가는 순간까지 공증이 필요한 치졸한 사본임을 잊지 마세요. 후반부를 후렴구로 착각하지도 않겠죠, 설마. 문어발의 진화로도 안개의 바닥을 짚어 볼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으세요. 미숙한 시간을 먹고 자라는 인큐베이터 속 구린 음부의 교성일랑 입을 틀어 막더래도.

                                                                                                                    200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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