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오늘:
55
어제:
219
전체:
5,030,170

이달의 작가
2009.06.01 12:52

슬픔의 궤

조회 수 402 추천 수 2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슬픔의 궤



이월란(09/05/31)




죽은 것들만 가득한 나의 커다란 방엔 짐짝같은 슬픔의 궤가 놓여 있다


나의 슬픔은


솜이불 아래 나란히 누워 계시던 엄마 아버지의 침상
반짝이는 가짜 귀고리들의 거짓 섬광
냉장고 속에서 딱딱이 굳어가는 찬밥덩어리
초록이 피를 쏟는 뒤뜰에서 통통 움직이는 먹통새의 걸음걸이
정확한 시각에 촤르르 올라가는 차고문 열리는 소리
뮤트의 버튼 하나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CNN 앵커의 입술
그랬대요, 그랬대요, 그랬대요, 크레셴도로 연주되는 항간의 입술들
UNKNOWN NAME 으로 떠 있는 ID 불명의 전화벨 소리
읽지않음으로 떠 있는 수신확인란의 지워지지 않는 붉은 글씨
슬로우모션으로 허상을 향해 달려오는 말티즈의 방울소리
UMMA 라고 시작되는 딸아이의 이메일
피안의 담장을 훑듯 비단뱀처럼 감겨드는 동침의 손길
쉬지 않고 욕망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심장박동 소리
먼지같은 빈집의 시간을 나란히 받아내고 있는 신발장 속의 신발들
다시 열기 위해 잠구길 서슴치 않는, 자꾸만 무거워지는 열쇠꾸러미
넘겨져버린 달력 위의 메모들, 아직 넘겨지지 않은 달력의 숫자들
눅눅한 시간을 말아쥐고 있는 빛바랜 승차권
깜빡 잠든 나를 코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머루알같은 강아지의 두 눈
주유를 경고하는 개스탱크 모양의 빨간 불빛
전생의 잔상처럼 데자뷰의 느낌으로 펼쳐지는, 살아있는 장면들
무명의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해 부여받은 백신 프로그램의 시크릿 코드
지금 막 저장되어버린, 소금호수 가운데 바다섬처럼 떠있던 엔털로프 아일랜드
내 인생의 산술을 밝히듯
내 이름보다 더 길게 찍혀 있는 크레딧카드 위의 아라비아 숫자들


호리병같은 나의 몸과 무선으로 연결된 네모난 궤짝 가득
배양접시처럼 슬픈 독(毒)이 슬고 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91 세밑 우체국 이월란 2009.12.22 365
990 벌레와 그녀 이월란 2009.08.29 365
989 제3시집 내부순환도로 이월란 2008.10.30 365
988 별리동네 2 이월란 2008.05.10 365
987 Sunshine State 이월란 2008.05.09 365
986 제로니모 만세 이월란 2011.05.31 364
985 핏줄 2 이월란 2011.04.09 364
984 독립기념일 이월란 2010.11.24 364
983 한 마음 이월란 2010.10.29 364
982 그리움 5 이월란 2010.04.23 364
981 밤마다 쓰러지기 이월란 2010.01.23 364
980 날아다니는 길 이월란 2008.05.10 364
979 생인손 이월란 2008.05.10 364
978 레모네이드 이월란 2008.05.09 364
977 숨바꼭질 이월란 2008.05.08 364
976 대숲 이월란 2011.03.18 363
975 영문 수필 Sign Language 이월란 2010.07.09 363
974 Mr. 딜레마 이월란 2009.12.09 363
973 수목장 이월란 2009.10.24 363
972 비질 이월란 2008.05.08 363
Board Pagination Prev 1 ...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 83 Next
/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