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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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9.06.01 12:52

슬픔의 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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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궤



이월란(09/05/31)




죽은 것들만 가득한 나의 커다란 방엔 짐짝같은 슬픔의 궤가 놓여 있다


나의 슬픔은


솜이불 아래 나란히 누워 계시던 엄마 아버지의 침상
반짝이는 가짜 귀고리들의 거짓 섬광
냉장고 속에서 딱딱이 굳어가는 찬밥덩어리
초록이 피를 쏟는 뒤뜰에서 통통 움직이는 먹통새의 걸음걸이
정확한 시각에 촤르르 올라가는 차고문 열리는 소리
뮤트의 버튼 하나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CNN 앵커의 입술
그랬대요, 그랬대요, 그랬대요, 크레셴도로 연주되는 항간의 입술들
UNKNOWN NAME 으로 떠 있는 ID 불명의 전화벨 소리
읽지않음으로 떠 있는 수신확인란의 지워지지 않는 붉은 글씨
슬로우모션으로 허상을 향해 달려오는 말티즈의 방울소리
UMMA 라고 시작되는 딸아이의 이메일
피안의 담장을 훑듯 비단뱀처럼 감겨드는 동침의 손길
쉬지 않고 욕망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 심장박동 소리
먼지같은 빈집의 시간을 나란히 받아내고 있는 신발장 속의 신발들
다시 열기 위해 잠구길 서슴치 않는, 자꾸만 무거워지는 열쇠꾸러미
넘겨져버린 달력 위의 메모들, 아직 넘겨지지 않은 달력의 숫자들
눅눅한 시간을 말아쥐고 있는 빛바랜 승차권
깜빡 잠든 나를 코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머루알같은 강아지의 두 눈
주유를 경고하는 개스탱크 모양의 빨간 불빛
전생의 잔상처럼 데자뷰의 느낌으로 펼쳐지는, 살아있는 장면들
무명의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해 부여받은 백신 프로그램의 시크릿 코드
지금 막 저장되어버린, 소금호수 가운데 바다섬처럼 떠있던 엔털로프 아일랜드
내 인생의 산술을 밝히듯
내 이름보다 더 길게 찍혀 있는 크레딧카드 위의 아라비아 숫자들


호리병같은 나의 몸과 무선으로 연결된 네모난 궤짝 가득
배양접시처럼 슬픈 독(毒)이 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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