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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2009.08.13 14:58

아가페 미용실

조회 수 534 추천 수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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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 미용실



이월란(09/08/13)



열대의 야자수처럼
하지만 이젠 기억 속에서조차 헝클어지고 엉켜버리기 일쑤인
긴 세월을 자르러 가면
예약은 녹화 테이프처럼 이미 방영 중이다


대기실에 길손처럼 앉아 있으면
머리칼은 왜 잘라도 아프지 않은걸까
세월의 모근이 무심한 듯 흘려 목덜미를 덮어버린 검은 추상


정물화 속에서 물감이 떨어지듯
체온 없는 머리칼이 체온을 버리는 소리
방음된 눈 앞에서 무작위로 뭉턱 떨어질 때마다
시체 부검하듯 죽은 것들의 넋을 만나는 것인데


피도 없고 뼈도 없는 허상을 만지는 것인데
통증의 틀 속에서 무통의 고백처럼 이탈하는 허심한 결별
어릴 때 돈 아낀다는 엄마에게 머릴 싹뚝 잘린 후
이불 뒤집어쓰고 학교 못간다고 울어재낀 계집아이는
이미 허상을 붙드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바람의 취향을 숭배한 건 말갈퀴같은 흑단의 머리채
어린 동자승의 민머리가 체모 없는 성기처럼 섬뜩한 것도
그래서 얼른 뛰어가 숨겨주고 싶은 것도


간판 하나로 허상에 동참하는 면허를 내건
아, 가, 페, 미, 용, 실
이 에로스적인 사업수완 앞에
머리칼은 땅 속에 묻혀야만 할 나무들의 뿌리일까
물구나무 선 나무가 되어
익어서 떨어지는 열매같지도 않은 이 검은 잎새들


바람의 전통을 계승한 길고 가벼운 천성으로
사라지지 못하고 끝끝내로 매달려 있는 이 약간의 오류들을
살짝살짝 쳐 주세요, 자연스럽게
인공의 미에 멀어버린 두 눈 아래 혀의 슬로건은 언제나
자, 연, 스, 럽, 게


사그랑 사그랑 가위질에 가위가 눌려
일요일에도 오픈 하시나요? 라고 물었는데
천국이 좋아요? 지옥이 좋아요? 라고 물은 것처럼
엄마가 좋아요? 아빠가 좋아요? 라고 물은 것처럼
묻는 내가 한심해지고
대답하는 주인도 어이없어져
우문 앞에 찡그리는 영특한 아이같은 톤으로
주일엔 안하죠, 물론
(주님의 날에도 머리칼은 자라거든요)
아, 가, 페, 미, 용, 실


주일에 장사하며 돈에 눈 멀어도 잠시 빗나간 하나님의 자식
주일성수 경건히 지키자마자 수입이 더 늘더라는 눈물의 간증 앞에
아멘으로 두 손 모아 정신차려도 하나님의 귀한 자식
자빠져도 축복, 엎어져도 축복


머리카락 수많큼 헤아릴 수 없는 축복, 축복, 축복
아가페 미용실의 축복받은 미용사여
연중 내내 기온이 높은 정수리에서
두 눈 거쳐가는 강우량도 높은 열대의 야자수처럼 회귀선을 빠져나온  
축복도 길고 긴 머리칼을 이제 땅 속에 묻어주세요
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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