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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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3시집
2009.09.29 11:50

구두의 역사

조회 수 531 추천 수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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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의 역사



이월란(09/09/28)
    


구부리고 앉은 머리맡에 길 없는 지도 한 장 걸려있다
구두약이 진열된 선반마다 잔 노을이 얹히면
말굽 닮은 가죽 창에 대가리 큰 징을 박을 때마다
걸어온 길들이 깔창처럼 새로 깔리고 걸어갈 길들이 쾅쾅 박힌다
배운 건 행인들의 과거를 뒤집어 훔쳐보는 얌생이질
검은색 푸줏간 앞치마 위에서 맨손으로 본드를 바를 때면
잃어버린 길들이 끈적끈적 딸려 나왔다
뜨듯한 물에 반시간쯤 담그면 다 벗겨지는 타인의 길
대동아전쟁 땐 태평양의 바람을 좇던 돛으로 하얀 돛배 신을 만들었고
육이오 사변 땐 죽은 병사들의 군화를 벗겨 구두를 만들었고
한 땐 폐타이어를 깎아서도 신발을 만들었다
송곳 끄트머리에 찔린 왼쪽 눈이 비뚜룸이 눌러 쓴 검은 베레모 아래서
실명의 세월을 가려주고 있다
점자책처럼 길을 읽어내는 눈 없는 신발마다 그의 잃어버린 눈을 달아준다
합성피혁도 천연가죽도 그에겐 똑같은 재봉틀 아래
실밥으로 고정시켜야 하는 궂은 날이고 갠 날이다
오렌지색 에나멜 구두를 검정색으로 리폼 해 달라는 손님을 볼 때면
양화점에서도 기성화를 떼어다 팔아야 했던 시절
횟집 차려 말아먹고 빵집 차려 말아먹고 구둣방으로 돌아온 나처럼
지우고 싶은 길들이 리폼을 해달라고 달려든다
젊은 암석처럼 세월의 인상이 싱싱하게 새겨진 축지된 판화 위에
바같 쪽에서부터 쉬 닳아오는 시간의 굽은
온 생의 척추를 휘어 놓기에 충분했다
표 나지 않는 팔자걸음으로 체중을 옮겨 심을 때마다
삐끗 생의 발목이 삐기도 했던 것인데
잠든 꿈처럼 앞코부터 뒤축까지 새겨온 골목들의 내력이
지붕 없는 마당 구석에 내팽개쳐진 청춘의 걸음걸음이
황혼의 둑길 위로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들이 목을 빼는
한 평 반 간판 없는 점포 속에서
숙련공의 정교한 손길 아래 비포장 된 타인의 길들이 닦이고 있다
광낸 구두 위로 뽀얗게 쌓이는 세월의 먼지가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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